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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나(III)

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나(III)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2.01.0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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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침입

기원전 539년 바빌론은 이란의 사이러스 대왕(Cyrus the Great)에게 멸망했다. 2000년 동안 셈족의 아성이던 메소포타미아는 이제 인도-유럽족에게 넘어가 1170여 년간 끈질기게 이어졌다. 사이러스는 역사상 진정한 지도자였는데 통치는 엄격했으며 또한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헤아리는 지도자였다. 그는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호전적인 아시리아사람들을 통치하는데 그들의 사회제도와 관습을 존중하면서 길들였다. 그는 이곳의 총독을 전임 이란 도지사 가운데 유능한 자를 발탁해 임명했다. 그리고 이곳 식민지로부터 요구사항은 공물(貢物)과 복종만을 요구했다. 사이러스가 죽자 바빌론은 얼마 동안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종국에는 식민지 반란으로까지 번졌다.

▲ 이란 파사르가데아 소재 사이러스 대왕 무덤(유네스코 세계유산 2006)

기원전 520년부터 485년까지 다리우스 대왕(Darius the Great)이라는 유능하고 혁신적인 왕은 바빌론의 정치적 안정을 되찾고, 대경제 번영을 가져왔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지역간을 연결하는 도로망의 구축으로 통신, 교통을 크게 발전시키고, 이로 인해 효율적인 관료주의를 확립했다. 기원 전 485년 다리우스가 죽자 쇠퇴하기 시작해 3년 후 바빌론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다. 이란은 반란을 격렬히 진압하고 탄압했다. 그리고 바빌론의 경제 기반시설은 심각하게 파손됐다. 초기에 이란 왕들은 이라크를 통치함에 있어 메소포타미아의 토지관리 방법을 성실하게 전례대로 따랐다. 그러나 그 후 기원 전 485년부터 331년 알렉산더가 정복하기까지 바빌론을 거의 보수를 하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에 한때 위대했던 도시 본래의 모습은 찾아 보기 힘들었다. 이 기간 중 무역 또한 크게 감소했다. 이미 개설되어 있는 사르디스(터키 남부에 위치한 고대 도시)부터 바빌론을 가로질러 수사(티그리스강 동쪽에 있던 고대 대도시)까지 무역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란 왕들은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동양에 더 관심이 있어 인도와의 교역만을 증가시켰다. 그 결과 바빌론과 아시리아는 이란제국의 9번째 관할구로서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궁핍하게 됐다. 이들의 빈곤은 과도한 세금부담과 중간 관리의 착취로 인하여 더욱 악화됐다.

이란의 지배는 기원 전 551년부터 331까지 200년간 지속됐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이란인이 메소포타미아로 유입되어 인구 구성이 민족의 종류도 다양화됐다. 아케메니드 통치 시절에도 이란인의 이라크로의 유입은 간헐적으로 지속돼 메소포타미아의 인구 통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다른 중요한 결과는 메소포타미아 언어가 점차 소멸되고, 이란 제국의 공식언어인 아라마익 언어(Aramaic; 기원 전 1000년-600년 간에 사용되던 국제무역어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됐으며, 시리아 지역에서 생겼다)가 퍼져 나갔다.

기원전 4세기경 거의 모든 바빌론 사람들이 아케메니드에 반기를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빌론에 주둔한 이란 군대가 알렉산더에게 항복을 했을 때도 모든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그에게 해방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알렉산더는 아케메니드와는 달리 바빌론의 전통을 존중했고 해방자라는 유리한 처지로 신속하게 바빌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알렉산더는 바빌론을 위해 야심찬 계획을 제안했다. 그는 두 황제궁 가운데 하나를 이곳에 세우기로 했으며, 유프라테스 강을 통해 페르시아 만까지 항로를 만들어 항구를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들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기원 전 323년 그는 인더스강 원정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32살의 나이로 바빌론에서 사망했는데 그 원인은 말라리아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가 죽은 후 정치적 혼란기에 빠져들었고 그 휘하의 장군들은 서로 다투어 제국은 분열됐다. 이들간의 싸움은 주로 바빌로니아 땅에서 치러졌다. 그리스 역사 후반기에 군사 활동은 페니키아(현 가나안 땅)항구를 점령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바빌론은 활동범위에서 벗어났다. 정치 경제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으로 옮겨지자 바빌론 여러 도시는 전에 가졌던 우월성을 잃었다.

비록 알렉산더의 메소포타미아를 위한 계획은 이행되지 않았고, 그의 장군들조차 별로 한일이 없지만 그리스의 이곳 점령은 주목할만하다. 알렉산더와 그 후계자들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모델로 삼아 중동에 많은 도시를 건설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가 티그리스 강가에 있는 셀레우치아(Seleucia; 현재 이라크 중부에 위치)다. 이 지역이 헬레니즘화됨에 따라 서양의 신, 서양 예술 양식, 서양적인 사고 등이 도입됐다. 그리스 무역 루트가 이 신도시를 지나게 되어 상업도 다시 일어났다. 메소포타미아는 보리, 밀, 대추야자, 모, 역청 등을 수출하고, 셀레우치아는 향신료, 금, 보석, 상아를 수출했다.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학자들간의 문화 교류는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가지 과학, 특히 천문학을 유지 발전 시켰다.

▲ 다리우스 3세와 싸우는 알렉산더 대왕.

기원 전 126년 파르티아인 ? 투르케스탄(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지방) 스탭지역에서 이란북동쪽으로 이주해온 똑똑한 유목민 ? 이 티그르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모두 점령했다. 이에 앞서 이미 이란을 점령한 파르티안은 동양과 그리스 로마 사이의 모든 무역을 관장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들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도시생활을 영위했다. 어느 외국의 점령보다 온화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는 크게 번창했다. 메소포타미아 인구는 주로 아랍인과 이란인이 대거 이주해와서 상당히 증가했다. 파르티아는 로마의 침공을 짧게나마 2번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 서기 227년까지 지속되다가 이란의 사사니드에게 정복당했다.

아랍 정복과 이슬람의 대두

사사니드를 무너뜨린 세력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이란은 아랍이 부족위주의 족속이고,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어 통치된 적이 없으며, 군사조직 또한 초기단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메카에 강력한 쿠라이시 부족 중 하시미테 씨족의 일원인 마호메트가 6세기경 이슬람에 관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지지자들을 모으며 자칭 예언자임을 선포하자 아라비아에서 급격하고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아라비아의 이러한 신흥 종교와 견고한 부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어 아랍을 정복하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서기 632년 일년이 채 안되어 마호메트가 죽었다. 대중과 함께하는 아부 바크르(Abu Bakr; 632-634) 성직자가 마호메트를 승계했는데 그는 최초의 카리프이며 마호메트의 장인이다. 그는 또 비잔틴제국과 사사니드 제국에 대한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이슬람의 이라크 습격은 아브 바크르 통치 시기에 시작됐다. 634년 별명이 이슬람의 칼이라는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칼리드 와리드 장군은 1만8000명의 부족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삼각주 주변에 주둔했다. 비록 이란점령군은 전술이나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으나, 비잔틴과의 끊임없는 군사작전으로 아주 지쳐 있었다. 사사니아 군대는 비효율적으로 싸웠다. 병력 충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망치지 못하게 사슬을 쳐놓고 싸우게 했다. 아랍의 첫 번째 전투는 ‘사슬 전쟁’ 이라고도 한다. 아랍의 칼리드장군은 주민에게 이슬람을 믿든지 아니면 공물을 내라고 하면서 이도 저도 아니면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고 최후 통첩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을 믿든지 공물을 바치든지 그렇지 않으면 단지 스스로 원망하게 될 것이다. 삶을 사랑하듯 죽음도 사랑하게 될 것이다.’

▲ 알라의 칼.
이슬람 정복 당시 대부분의 이라크부족은 기독교 교인이었다. 그들은 지즈야(Jyzay; 비 모슬렘이 모슬렘 통치 지역에 거주할 때 내는 세금)를 내기로 결정하고, 이슬람을 믿지 않고 세금을 내었는바 그 이상 어떤 제약도 받지 않았다. 이란은 잠시 나마 그들의 영웅인 러스탐 휘하로 규합되어 유프라테스 남서부의 알 히라에서 아랍 침략군을 공격했으나 참패당했다. 다음 해인 635년 아랍은 이란을 부웨브전투에서 철저하게 패배시켰다. 마침내 636년 러스탐은 바그다드 남쪽 유프라테스 강가 마을 카디시아에서 살해됐다. 이란은 아랍 보다 6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결정적으로 참패했다. 그리고 이슬람 군대는 사사니드 수도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슬람의 정복원정은 보다 쉽게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비잔틴과 사사니드 왕조가 문화적, 사회적으로 파산상태에 이르러 피폐해져 현 주민은 침략자인 아랍에 협조해도 별로 손해 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슬림의 전사는 지하드 즉 성전(聖戰)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법에 따라 겁탈이나 여자 또는 어린아이, 종교지도자, 실제적인 비 참전자 등의 살육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더욱이 무슬림의 전사는 정복한 땅을 무슬림법에 따라 안정시켰다. 이와 같이 그들이 필요이상으로 무차별하게 파괴시키지 않았던 것은 종교적 이유이지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마르 칼리프(The Calipf Umar; 634-44)는 새로 점령한 영토내 도시에 수비대를 설립하라고 명령을 내려 이라크의 수도 쿠파(Al-Kufah; 현 바그다드 남쪽에 위치)와 바스라에 수비대를 두었다. 우마르는 점령한 이란 땅에 행정조직을 만들었다. 이란인의 충고에 따라 우마르는 사사니드 의 디반(Divan; 회계기록소)을 존속시켰다. 디반은 기본적으로 기록을 보존하며, 소득과 지출을 규제하고, 행정을 집중하는 기구로서 이슬람이 정복한 모든 영토에 이 제도를 실시했다. 사사니드 시절에 존재하던 소규모의 세리는 지속시켰으나 이들은 별 재미를 보지 못했고 아랍은 이들을 유해한 존재라고 보았다. 아랍어가 공식어로 페르시아어를 대체하여 점차 퍼져 일반화됐다. 이라크인은 아랍인과 결혼했고 이슬람으로 개종도 했다.

650년까지 무슬림의 군대는 아무 다리아 강까지 도달했으며 사사니드의 모든 세력권을 장악했다. 아랍의 확장과 정복은 여기서 사실상 끝이 났다. 그 이후 주 세력집단은 현상을 유지하는데 힘을 썼으며, 2차 세력집단은 정치적 종교적 반란을 막는데 주력했다. 반란의 이념적 근거는 주로 종교적인 조건에 있었다. 종교 교리 해석상의 차이는 빈번한 무력충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실제로 종교적 논쟁의 저변에는 민족적 또는 문화적 불만이 깔려 있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논란

▲ 알리 이븐 아브 탈리브.
신생 이슬람사회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는 칼리프의 올바른 계승자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3대 칼리프 우트만은 칼리프 선출 중이나 후에도 반대파와 대치하게 됐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촌이며 사위(예언자의 생존한 유일한 핏줄인 외동딸과 결혼)인 알리 이븐 아브 탈리브(Ali ibn Abu Talib)가 강력한 도전자였다.

알리의 경건주의는 기득권 층 즉 우트만이 전임 칼리프 우마르의 정책을 승계해 보수주의자로 믿는 층을 아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알리는 공식적으로 반대를 표명했고 이로 인해 종교적인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알리는 코란의 지시와 일치하지 않는 혁신을 했다고 선포했다. 표면적으로 경제가 반대자들의 주요 요인이었으나, 이 또한 종교적함축성을 띠고 있었다.

이슬람의 영토 확장에 따른 급격한 군대의 팽창은 우트만을 군비 등 재정문제로 괴롭혔다. 많은 베드윈들이 이라크와 이집트에서 군복무를 자원했다. 이들의 검소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가운데 힘들게 살았다. 그러나 히자즈(Hijaz; 사우디 아라비아 서부 지역) 아랍사람들은 정복한 각 지역으로부터 생기는 이익으로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렸다. 이 베드윈 자원군은 토지할당과 수입배분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를 대변해줄 사람은 알리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불평불만 분자들은 불이익을 개선코자 임지인 이라크와 이집트를 떠나 메디나로 향했다. 우트만은 개선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이 반란군은 우트만이 이집트 총독에게 보내는 서신을 탈취한 바 그 내용은 반란군을 단죄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반란군은 메디나의 우트만 집을 포위하고 결국 그를 살해했다. 우트만을 살해 한자는 무슬림이며, 초대 칼리프 아브 바크르의 아들이다. 무슬림 세계는 벌컥 뒤집혔다. 이 포위 작전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알리가 칼리프로 선출됐다.

알리의 두 반대파 중 하나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미망인 아이사(Aisha)이며, 우티만의 죽음에 대한 고발과 응징하겠다고 나섰다. 세 명이 원인 규명 차 이라크로 향할 때 알리의 군대가 바스라에서 개입했다. 아이사의 수족 두 사람은 살해됐고, 알리는 완전하게 승리했다. 다음은 우트만의 친척이며, 시리아의 총독인 무아위야(Muawiyah)로서 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친척의 복수할 권리를 요구했다. 알리와 무아위아 두 군대는 시핀평야(The Plain of Siffin; 시리아에 있는 가장 굴곡이 심한 유프테스강 가의 평야지대)에서 무슬림 간에 아주 중요한 싸움을 벌렸다. 무아위아는 자기 군대가 패색이 짙어지자 중재를 제안했다. 이에 따라 두 중재자가 우트만의 죽음에 관한 결정을 하기 위하여 정해졌다. 이 결정은 알리에게 살해범이라기보다 사형집행인의 신분을 부여하여 우트만의 친척의 요구사항을 무마해보려고 했다. 중재자들이 알리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자 그는 이슬람법 샤리아(Sharia)에 맞지 않는다고 항의하면서 싸움을 다시 하겠다고 했다.

알리의 결정은 그를 추종하는 과격분자에게는 늦은 감이 있었다. 이 추종자들은 반역자가 복종 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코란을 인용하면서 알리가 중재 안을 받아 드린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전투의 결과에 의하여 신의 결정이 내려진다는 뜻에 거슬렀던 알리는 머리를 숙였다. 이 전쟁 반대자를 카라지테(Kharajites; 아랍어 동사 kharaja- 빠지다. 철회)라로 알려졌으며, 전쟁을 그만 두었다. 알리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카라지테를 항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카라지테를 살해했다. 독실한 무슬림에 대한 그의 부당한 처사로 수 많은 추종자들이 등을 돌렸다. 그는 바그다드 남쪽 150km 떨어진 쿠파로 불가피하게 되돌아와서 이슬람사회 내부 진전상황을 지켜보았다.

여러 명의 지도자가 아드루(현 요르단 남부 지역)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가운데는 시핀의 두 중재자도 참석해 승계문제에 관한 한 가지 해결책을 내놓았다. 마침내 알리도 무아위아도 칼리프가 될 수 없다고 하며 우마르의 아들 아브드 알라를 제안했다. 최종합의를 보지 못한 채 회합은 혼동 속에서 끝났다. 알리와 무아위아는 각자 자기 통치 지역에서 호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무아위아는 지지자들로부터 칼리프로 추대되어 새로 점령한 이집트에서, 알리는 이라크에서 기다리며 자기 세력을 키워갔다. 무아위아는 알리를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는 회색 분자들의 불만을 더욱 조장했다. 661년 알리는 쿠파에서 기도 중 카라지테에게 살해됐다. 무아위아는 자신의 칼리프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알리의 장남 하산(Hasan)을 설득했다. 하산은 그 후 얼마 안돼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시아 (Shia; Shiatu Ali라는 아랍어에서 나왔으며, 그 뜻은 알리 추종자 또는 알리 분파이다)는 그가 독살됐다고 선포하고 그를 최고의 순교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자연사가 아닌 알리의 죽음은 미래의 시아파운동의 분명한 효시가 됐다. 알리의 추종자들은 이 문제를 되짚으면서 발빠르게 움직였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이슬람역사상 알리만큼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시아파가 선포한 믿음이란 “거기에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은 없으며, 마호메트는 예언자이며, 알리는 하나님의 성자이다.”였다. (There is no God but God; Muhammad is his Prophet and Ali is the Saint of God)

그 후 무이위아가 칼리프로 선포됐다. 이렇게 하여 우마야드왕조가 다마스커스에 도읍을 정하고 시작됐다. 680년 무아위아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야지드 1세(Yazid I)는 아버지와 같이 반대파를 과감하게 진압하지 못했다. 알리의 둘째 아들 후사인(Husayn)은 야지드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으며, 야지드에 반대하는 시아파(대부분이 이라크인)를 이끌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메카로 피신했다. 알 쿠파 총독 우바야드 알라는 음모를 색출하고 그를 설득시키려고 이라크 카르발라(바그다드 남서쪽에 위치)에 파견대를 보냈다. 남녀 200여명의 후사인 무리가 항복을 거부하며 항거하다가 종국에는 4000여명의 우마야드 군대에 의하여 모두 사살됐다. 야지드 1세는 후사인의 수급을 받아들었다. 후사인의 사망일(680년 10월 10일) 열번째 무하람(Muharram; 이슬람력의 첫 달)을 시아파의 애도의 날로 정해져 계속 준수되고 있다. 알리는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130km 떨어진 나자프(Najaf)에, 후사인은 바그다드 서남쪽 80km 떨어진 카르발라에 매장됐다. 이곳은 시아파의 성지 순례지로서 이 두 곳을 다녀오면 메카를 순례한 것과 동급이라 한다.

▲ 후사인 성지(이라크 카르발라).

이 사건의 중요성은 이슬람 역사를 회고해볼 때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감이 든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슬람이 양대 종파로 갈라서게 됐다. 하나는 알리의 분파(Shiatu Ali; Party of Ali)인 시아파(Shiites)와 무아위아의 추종자인 수니파[’Ahl ?s-Sunnah wa ?l-?am?‘ah(Arabic: ); 영어로는 ‘people of the tradition of Muhammad and the community’이다]는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정통파라고 믿고 있다. 우마야드가 칼리프라는 유리한 고지에서, 카르발라 사건을 일으켜 반대파를 격렬하게 진압하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나 사태는 오히려 대조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즉 기본 교리는 수니파와 같으나 자신들의 견해와 경험을 교리에 반영하여 섬세한 교리 차이를 만들어 시아파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시아파는 반대파의 특권과 세력을 정당하게 계승된 것이 아니라며 인정치 않고 이들이 이끄는 이슬람에 반기를 들었다. 알리 사후 승천한 뒤에 우마야드가 칼리프가 된 것은 잘못된 길이기 때문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의를 위하여 희생된 후사인은 사회 평등과 올바른 경제 질서를 위해 투쟁하는 시아파 세대를 고취시킨 전형적인 모범자라고 내세운다.

칼리프 시절 알리는 수도를 이라크 알 쿠파에 두었으나 우마야드는 세력을 시리아로 이전하고 수도를 다마스커스에 두어 이라크 사람들에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우마야드 통치 시절 이라크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으려고 수 많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라크 정세는 다시 불안해졌고, 칼리프 우마야드는 687년부터 692년까지 전쟁을 계속했다. 694년에 알 하자즈 총독으로 보내 평정시켰고 농업과 교육에 힘썼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2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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