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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에너지이슈 최고 원로에게 듣다

2012 에너지이슈 최고 원로에게 듣다

  • 기자명 정욱형 발행인
  • 입력 2012.01.0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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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공사 정근모 고문

올해는 또 어떤 일들이 에너지업계를 강타할까? 아무래도 지난해 전 세계의 관심이 몰렸던 원자력이 여전히 가장 큰 이슈가 될 듯하다. 특히 올해는 핵안보 정상회의가 3월 서울에서 열린다. 원자력인더스트리서밋과 함께…
우리나라의 원자력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한국전력공사의 정근모 고문. 그는 카이스트 설립책임자로, 두 번에 걸친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과학자출신 대선후보로 유명하다. 하지만 사실은 M.I.T대, 뉴욕공대 핵공학과 교수출신으로 한국전력기술의 초대 전임사장, 국제원자력기구(IAEA) 의장 등을 거친 원자력전문가다. 2009년의 UAE원전 수출과정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분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너지공학회 초대 회장, 세계 에너지회의 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에너지산업에 몸담아온 최고 원로다.
지난해 12월 중순 여의도 한전 고문실에서 그를 만났다. 2012년 이슈를 듣기 위해… 그리고 과거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볼 요량에서였다. 그는 70을 넘긴 나이에도 수려한 용모에 고고한 인품을 보이며,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으로 우리 취재팀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다. 그의 삶은 영화화되어도 좋을 만큼 파란만장 그 자체다. 에너지인들의 선배로서가 아니라 모든 이들이게 귀감이 되는 그다. 우리나라 원자력, 에너지업계는 물론 과학기술분야에 그가 없었다면… 생각만으로 아찔하다.




2012, 새로운 에너지 패러다임을 여는 해


“새해는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인 해입니다. 미국과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가 있고 중국 총리가 바뀌고, 일본 총리도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계 정치적 지도자가 바뀌는 만큼 국가, 사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기존의 시각으로 보면 유럽을 비롯한 세계 경기가 위기에 직면했다고 볼 수 있지만 새로운 시각에서 보면 가난한 나라에 기회를 주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할이 매우 크고 이는 곧 우리에게 ?Golden Opportunity’가 될 것입니다.”

정근모 한전 고문은 올해 우리나라에게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해가 될 것임을 장담했다.

특히 에너지를 많이 쓰는 나라들은 새로운 에너지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야 하는데 에너지절약, 신재생에너지도 중요하지만 원자력 발전 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전 세계의 원자력발전 기수를 맡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는 일본이 전체 54기 원전 중 현재 운전 중인 8기마저 올 봄부터 정기점검에 들어가기 때문에 원자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 한 번 발전소가 정지되면 여론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까지는 일본이, 미국이, 프랑스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아왔지만 이제는 우리가 리드할 수밖에 없다며 원자력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사명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술혁신, 관리혁신, 정책혁신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

정 고문은 에너지업계 올 최대 이슈는 뭐가 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도 ‘3월 핵안보정상회의’라고 답했다. 세계 경기 또한 불투명하지만 우리 에너지업계로는 중대 행사인 핵안보정상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는 등 기회의 해가 될 것이다. 지난해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남긴 교훈으로 이제 핵안보는 원자력안전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2009, 한전고문으로 UAE원전 수주를 견인

UAE의 본격적인 시작은 2008년부터 시작됐다. 미국 워싱턴근교에 있는 한 미국회사가 엔지니어들을 모아 UAE원전 타당성조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조지메이슨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던 그는 원자력대사출신인 이 회사 대표와의 친분으로 UAE원전건설에 관심을 갖게 된다. 미국 교수직까지 그만두고 한전 고문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UAE원전 수주에 총력을 기울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UAE원전수출과 관련 2009년 10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부터 경쟁은 시작됐죠. 다행히 한국에서 일했던 미국 엔지니어들이 대거 타당성조사에 참여하고 있어 유리했습니다.”

원자력르네상스의 실질적인 시작이 된 아랍에미리트 원자력발전소 건설에는 원래 6개팀이 응찰했다. 한국, 미국, 일본,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히타치·GE 컨소시엄이 경쟁했다. 가장 유력한 팀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일본의 도시바였다. 하지만 이들 회사는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고, 한국은 프랑스의 아레바와 GE 컨소시엄과 최종 경쟁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말 ‘47조원의 공사 수주’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규모 공사를 따냈다.

향후 20년 동안 중국, 인도, 요르단, 터키, 말레이시아 등 70여개국이 300여개의 원전을 지을 계획으로 있다. 원전수출 산업은 중공업과 플랜트사업이 절대적으로 강한 한국에게 유리하며 앞으로의 미래도 밝다.

1982, KOPEC 사장으로 한국형 원자로 길을 열다

원전 수출이 가능했던 것은 20여년 한국형 원자로를 향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서 시작됐다. 한국형 원전 기술자립을 꿈꾼 이들이 있었다.

1982년 그는 한전의 자회사인 한국전력기술(KOPEC, 현 KOPEC E&C)의 사장으로 부임했다. 겸직이 아닌 전임 사장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원자력이 최고의 에너지로 부상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한국형 원자로를 설계할 것이라고. 3년 임기 사장이 최소 10년이 걸리는 한국형 원자로사업을 장담하자 의야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인재를 골라 교육시키는 일부터 최고의 기술자로 만드는 토대를 만드는데 주력했다.

그가 부임할 당시 사명은 한국원자력기술이었고 직원은 고작 250명이었다. 그는 사명을 원자력기술에서 한국전력기술로 바꿈으로써 미래 먹거리를 마련하는 동시에 회사 규모를 키우는 계기를 마련했다.

“회사에 있어서 영업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한국전력의 자회사라는 점을 부각시켜 한국전력기술로 사명을 바꿨습니다. 그후 한전 관련 기술용역을 독식할 수 있었죠. 영업은 자연스럽게 됐습니다.” KOPEC은 이후 꾸준히 회사 규모를 키울 수 있었다.

교수 출신인 그는 경영자로서의 능력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지금도 정고문은 회사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던 그 당시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현재 한전 고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무실이 바로 한국전력기술 CEO의 방이었다.

1959, 정부기구 원자력원에서 일을 시작하다

2009년은 국내에서 원자력 개발이 시작된지 50년이 되는 해로 그가 평소 주창했던 ‘산전국의 꿈’이 실현된 해다. 바로 그 50년 전인 1959년 정고문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과학기술처 산하 정부기구인 원자력원에서 일을 시작한다. 같은 해 7월 14일 국내 최초의 현대적 국립연구소인 원자력연구소가 세워졌다. 당시의 기념사진은 정 고문의 방 액자에 고스란히 남아 우리나라 원자력의 긴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당시 그는 ‘21세기가 되면 에너지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오를 것이며 원자력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임’을 알았다고 한다. 이 선물은 선용하면 인류가 엄청난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나, 악용하면 참담한 비극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을 당시 정부관계자와 그는 간파했던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이부분에 있어서는 시대를 멀리보는 리더십을 발휘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2010,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설립을 돕다

정 고문은 2009년 한전 고문을 맡아 UAE원전 수주를 추진하면서 이에 소요될 전문인력 양성의 필요성을 함께 걱정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K-INGS)의 추진이다. 올해 3월이면 첫 입학생이 들어오게 되는 K-INGS는 전문석사와 기술박사과정으로 절반은 한국학생, 절반은 외국학생을 뽑을 예정이다. 빠른 투입을 위해 전력관련 산업 3년이상 종사자가 대상이 된다.

원전 전문인력은 지난 10년간 큰 변화가 없었으나, 국내 원전 건설·운영, UAE 원전, 추가 원전 수출 등으로 2020년까지 신규 인력 수요가 발생해 인력규모가 현재의 2배 이상이 필요한 상황이다.

“원자력은 핵공학이나 원자력공학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공학, 기계공학, 전기공학, 화학공학, 계측공학, 토목공학 등이 함께 어우러져야 합니다. 또한 체르노빌 사고나 후쿠시마 사고의 교훈에서 보듯 안전이 무엇보다 강조돼야 하기 때문에 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원전 수주만 하고 교육을 통해 필요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죠.” 그는 누구보다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K-INGS는 원자력발전소 운영·건설·보수를 중심으로 현장 실무능력을 갖춘 지도자급 전문인력을 양성을 주요 목표로 추진됐고 그는 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고리원자력 단지(운전중 5기, 건설3기, 계획4기, 원자력교육원) 내에 위치한 온사이트(On-Site, 작업현장) 캠퍼스는 지난해 9월 준공됐다.

1971, 미국지원 이끌며 KAIST 설립 ‘산파역’도

우리나라 고급 과학기술 인력의 산실을 자처하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탄생한데는 그의 역할이 컸다. “미국 교수시절 같은 학교 총장이었던 분이 미 국무성 국제개발처 책임자로 취임하면서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미국의 원조정책을 바꾸고 싶다고 제게 아이디어를 물었습니다. 즉석에서 한국에 과학원을 창설해달라고 제의했습니다.” 당시만해도 최고학부과정은 외국유학을 통해 마치는 경우가 많아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위해서 국제수준의 대학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자금과 한국의 자금이 만나 지금의 KAIST가 탄생했다. 1971년 2월16일 과학한국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한국과학원이 설립됐다. 그는 과학원 설립후에는 32세에 부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젊은이여 멀리, 넓게 보고 헌신하라

시험만 보면 수석을 하고, 대한민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다.

그는 “나의 학력이나 경력을 보고 천재적이라고 놀라워하며 칭찬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꾸준한 노력에서 얻어진 산물입니다. 단지 학문을 좋아했고, 시험을 잘 보는 법을 알았던 것인지 모르지만 늘 열과 성을 다해온 것 같습니다. 늘 온전히 헌신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가 늘 하신 말씀이 돈을 돌로 봐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그였기에 오늘의 과학기술강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과거보다 좋은 여건에 있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세계를 위해, 미래를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좀 더 멀리보고 좀 더 넓게 본다면 K-POP의 신화가 에너지업계에도 이어질 것임을 강조한다.

나이로비에 KAIST 유사기관 세우는 것이 꿈

새해 개인적인 소망이 뭐냐는 질문에 “마음은 젊지만 다들 원로라고들 하니까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과거 경험을 되살려 보탬을 주려고 합니다.”며 특히 내년에는 NATURAL TECH에 관심을 가질 예정이다. 위험관리는 확률이 적은 것도 발생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하는데 핵안보가 중요하게 논의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를 한때 대선후보로까지 나서게 했던 ‘정직한 초인류 국가건설’은 과학기술경제에서 시작한다. “과학기술경제로의 변화는 이제 때가 무르익은 것 같습니다. 과학기술을 바탕에 둔 경제는 가난한 나라에도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나라 한전 고문, UAE국가원자력 고문외에도 말레이시아 국가 과학고문, 아프리카 케냐 국가고문 등을 맡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케냐의 나이로비에 우리나라의 KAIST와 같은 과학기술원을 만들어주는 꿈을 갖고 있다. “케냐는 에티오피아 우간다 르완다 탄자니아 등 동아프리카지역이 모두 연결되니까 전기, 에너지 배급망도 함께 쓸 것입니다. 과학기술로서 모두 잘 살게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듯이 우리도 가난한 나라들이 모인 아프리카에 물고기가 아닌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면 좋겠습니다”는 꿈을 피력했다. 그가 평생 바쳐 이룬 기술강국의 꿈이 아프리카로 퍼져나가길 기원해본다.

정근모, 그는 누구?

과학기술강국 대한민국을 견인한 일등공신
핵공학 교수, 과기부 장관, IAEA 의장, KOPEC 사장 등 역임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고문은 1951년 제1회 국가고시에서 수석을 차지해 경기중학교에 입학했고 경기고에도 수석으로 입학했다. 고1때 대학입학검정고시 수석합격 후 서울대 물리학과 차석으로 합격해 1959년 20세의 나이에 대학을 졸업했다. 이공계 출신으로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수석 입학해 언론에 보도가 되기도 했다. 미국 유학때는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입학자격시험에 역시 수석을 차지해 석사과정 없이 박사과정에 들어가 2년 6개월만에 학위를 받는(1963년) 천재적인 면모를 과시했다.
이후 그는 플로리다대학교 조교수로 임명된다. 당시 언론은 24살의 ‘소년 대학교수’를 보도하기도 했다. 이후 프린스턴대학교 박사후(Post-Doc) 과정(1964~66년)을 거쳐 M.I.T.대학교 핵공학과 연구교수(1966~67년), 뉴욕공과대학교 전기 물리과 부교수(1967~71년)를 역임하던 중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한국과학기술원(KAIST)설립을 제안, 기획하고 돕다가 1971년부터 한국과학기술원의 부원장으로 일한다. 1975년 건강상의 이유로 미국뉴욕공대 핵공학과 교수로 다시 도미했다가 1982년 한국전력기술(주)의 초대 전임사장이 된다. 당시는 한국원자력기술이었던 회사이름을 취임즉시 한국전력기술로 변경하고 한전의 엔지니어링 전문자회사로 회사규모를 몇 배씩 키우며 최고경영자로서도 능력을 발휘한다.
이후에도 그는 놀라운 이력을 계속 만들어간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차례 지낸 그는 그 전후에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등 단체장은 물론 아주대학교 에너지학과 석좌교수, 호서대학교 총장, 명지대학교 총장 등 교육계에도 몸담아왔다.
이외에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자문위원, 이사를 거쳐 의장에 선출돼 한국인 최초의 UN기구 의장으로, 과학기술인들의 대표로 대선후보에 출마하기도 했다. 한국에너지공학회 초대회장, 세계 에너지회의 부의장 등 국내 에너지인을 대표하는 최고 원로로 2013년 열릴 세계에너지총회(WEC) 대구 유치에도 많은 역량을 발휘했다. 최근에는 한국전력 고문으로 UAE 원전 수출과 원전 국제화에 필요한 인재 육성을 위해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설립을 돕기도 했다.
사랑의 집짓기운동연합회 이사장,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연합회 이사장 등등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도 그는 선봉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저서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겸손하지만 강한 종교인으로 헌신을 통한 사랑을 실천해가고 있다.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2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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