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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나(Ⅳ)

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나(Ⅳ)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2.02.0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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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바스 통치시대의 전성기.

아바스왕조의 칼리프 통치 시대(750~1258)

아랍세력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한 수많은 이라크인과 이란인은 이란 북부 코라산지역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이들은 바스라총독 지야드에게 이곳으로 쫓겨난 5만여명의 베드윈과 합세했다. 메르브(Merv: 현소련의 메리시)도시에서 이러한 분파주의자들은 마호메트 삼춘의 후예인 아바스를 지지하면서 하심 가문의 기치를 내걸고 반대세력을 구축했다. 하심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조부로서 시아파와 아바스 계통의 선조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아파는 하시미테 왕조의 지도자인 아부 무스림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744년 무스림군대는 우마야를 공격해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750년 아바스는 바그다드에 아바스 왕조를 세워 첫째 칼리프가 됐다. 아바스왕조의 지지자들은 이 신흥국을 ‘축복받은 왕국’이라 부르며, 정의와 번영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믿으며 그를 신으로부터 왕권을 받은 통치자로 추앙했다. 그러나 이 왕국의 정치적 정책은 우마이야의 그것과 별차이가 없었다.

초기의 7대에 걸친 칼리프 통치기간 동안 바그다드는 아랍권의 중심이었으며, 이란과 아랍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철학, 과학 그리고 찬란한 문학까지 모두 꽃피웠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관해 전 아랍권에서 칭송하고, 특히 이라크인은 이 시기를 어느 때보다 문화가 꽃피었던 절정기라고 말하고 있다. 아바스 왕조의 제2대 칼리프 알 만수르(Al Mmansur, 754~775)는 바그다드시 사사니(이란의 왕조이름) 마을 근처에 원형 성채를 쌓아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50년이 채 안된 기간에 방대한 관료체제에 가담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려고 이 성안으로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어 성안은 상당히 비대해졌다. 바그다드에는 아시아와 지중해 지방을 잇는 거대한 상권이 조성됐다.

만수르 1세의 손자 하룬 라시드(Harun ar Rashid, 786~806)의 통치 시 바그다드는 콘스탄티노플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됐다. 바그다드가 이 방대한 도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관료들이 치수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의 관리를 잘 했기 때문이다.

▲ 지식, 문화, 상업 등 모든 것이 바그다드로 집중됐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모델 칼리프이기 도한 하룬 라시드는 지적 탐구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아랍문화의 찬란한 개화(開化)는 그의 아들 알 마문(Al Mamun, 813~833)시대에 이르러서야 절정기를 이뤘다. 하룬 라시드가 죽자 아민과 마문 형제간에 칼리프지위 승계를 놓고 다툼이 일어났다. 이들의 갈등은 급기야 내전으로 까지 번졌다. 마문은 이란의 지지를 얻었고 아민은 이라크가 밀어 주었다. 마문은 코라산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813년에 바그다드를 손에 넣었다. 아바스왕조가 수니파 무슬림이지만 엄격한 통치로 시아파의 원한을 효과적으로 억제했다. 대부분이 시아파인 이란인은 마문이 그의 수도를 고향인 메르브에 둘 것을 원했으나 결국 이라크 시아파들이 수도를 바그다드에서 타지로 옮겨갈 경우 위신과 경제력의 손실에 대한 반발을 생각하여 바그다드로 결정했다.

이에 실망한 이란인들은 아바스 통치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지방에서는 타히르(Tahirds, 821~837), 수파리(Suffarids, 867~1495), 사마니(Samanids, 819~1005)와 같은 소 왕국이 등장했다. 그리고 서쪽에서는 스페인이 756년, 모로코가 788년, 튀니지가 800년에, 이집트가 868년에 각각 아랍권에서 이탈했다. 이때 이라크 남부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869년 알리 무하메드(Ali ibn Muhammad)가 잔지(Zanj: 중세시대 흑인의 땅이라는 아랍어)로 알려진 검은 노예들의 국가를 설립했다. 잔지는 이라크의 남부 및 이란의 남서부를 장악하면서 과거의 주인을 노예로 만들었다. 잔지의 난은 883년 크나큰 고통과 혼란을 겪은 후에야 비로서 진정됐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양 파벌 때문에 통합된 정권의 부재로 필요할 때 강력한 정치적 제재를 가할 수 없게 되어 이슬람 세력은 크게 약화됐다. 비록 여러 가지 언어와 문화의 혼합은 이슬람문명을 풍부하게 했으나 한편으로는 긴장도 고조돼 아바스의 권력 쇠퇴를 가져왔다.

▲ 완전 무장한 맘루크의 모습.
아랍과 이란,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분열에 더해 투르크의 명성이 군사적 및 정치적으로 높아 지자 궁중에서는 불만과 경쟁이 치열해졌다. 유목민인 투르크어족 전사는 장기간에 걸쳐 중앙아시아로부터 옥서스강을 건너왔다. 9세기 초 아바스 칼리프는 노예 전사 맘루크(Mamluk: 노예출신 군인)제도를 도입했다. 아바스 왕국의 궁정 근위병을 당초 이라크 장교의 지휘 하에 있던 맘루크로 세웠다.

그러나 833년에 이르러서는 그들 자신이 장교가 되고 능숙한 군대로서 공헌한 바가 커짐에 따라 점차적으로 궁정 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칼리프 무스타심의 어머니는 투르크 출신 노예였으며 그녀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10세기경에는 투르크 지휘자는 이란과 아랍의 경쟁자들부터 더 이상 견제를 받지 않았으며, 칼리프를 지명하거나 퇴위 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됐다. 이때 사상 처음으로 칼리프의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인 역할이 분리됐다. 그래도 맘루크는 계속해서 칼리프의 세력을 용인한바 이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며 다만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945년 이란 서부지역을 예속시킨 다음 부와이흐조(Buwayhid)로 알려진 군벌은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카스피해 남쪽 이란의 데이라만성(The Province of Daylaman) 출신 시아파 부와이흐조는 수니파인 아바스 칼리프를 계속해서 추대했다. 시아파 그것도 이란 출신에 의하여 조종되는 칼리프 신분의 굴욕은 막심했다.

1055년 부와이흐조는 또 다른 투르크어족인 셀주크에게 축출됐다. 셀주크는 옥서스강 북쪽에 살았던 오그주 투르크의 키니크 그룹의 지배자급 씨족이었다. 그들의 지도자 투그릴 베그가 코라산의 지방통치자에게 최초로 등을 돌렸다. 그는 남쪽으로 이동한 다음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계속해서 정복해 나아가면서 지나는 길에 점령한 도시는 파괴하지 않았다. 1055년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투그릴 베그에게 대례복, 각종 선물과 ‘동방의 왕’이라는 칭호까지 주었다. 왜냐하면 셀주크는 수니파이며, 그의 통치는 바그다드에서 환영을 받았다. 셀주크는 칼리프를 존경은 했으나 종국에는 명목상의 최고 권위자로 전락시켰다.

▲ 셀주크 영토.

셀주크에는 몇몇 계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주류는 보스포러스부터 투르크스탄까지 대략 1155년까지 통치했다. 셀주크는 계속해서 영토를 널 펴나갔다. 그들은 단지 이라크인과 이란인으로부터 공물을 받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땅을 관리하도록 놓아 두었다. 또 다른 계통의 셀주크인 마레크왕(Malek Shah)은 동부 지중해지역, 소아시아, 일부 아라비아에 터키 등지에 터키규칙을 적용했다.

▲ 니잠 알 물크 흉상(이란 제2의 도시이자 성지인 마슈하드 소재).
그의 통치 하에서 이라크와 이란은 문화와 과학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이 같은 성취의 주 요인은 마레크왕의 뛰어난 이란 출신 고관, 니잠 알 물크(Nizam al Mulk)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상 가장 능란한 행정가 중 한 사람이었다. 이란의 석학 오말 카이암이 새로운 달력을 만들기 위하여 연구소로 사용한 천문 관측소를 세웠고, 주요 도시마다 종교학교를 설립했다. 가장 위대한 이슬람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아브 하미 가잘리(Abu Hamid al Ghazali)와 뛰어난 학자들을 셀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로 데려와서 격려해주고, 그들의 작품 활동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1092년 마레크왕이 죽자 셀주크의 세력은 와해됐다. 이라크와 이란 각지에서 소규모 왕국이 난립했다. 그리고 셀주크의 통치권이 자기 차지라고 주장하면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데 급급했다. 1118년부터 1194년까지 9명의 셀주크 술탄이 바그다드를 통치했는데 단 한 명만이 제명에 죽었다. 당초 셀주크의 집사장 아타베그(Atabeg: 셀주크의 지방 총독)는 자신의 소신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가운데 몇몇은 아타베그는 지방 왕국을 세웠다. 한 아타베그 출신은 장기왕조(1127~1222)를 일으켜 모슬에 자리를 잡았다. 장기왕조는 십자군 침입에 무슬림들에게 반기를 들도록 용기를 주는데 이용됐다. 마지막 셀주크의 이라크 술탄 투그릴(1177~1194)은 아랄해(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시이에 있는 내해) 남쪽에 살던 터키왕국의 흐와리즘(Khwarizm) 샤에게 살해됐다. 그러나 흐와리즘 통치를 위한 후계계자가 정해 지기도 전에 바그다드는 몽고군대가 들끓었다.

몽고의 침략

▲ 해골 피라미드.
13세기 초 테무진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나와 대부분의 주요 몽고부족을 단합시키고, 이 세력을 가지고 중국을 휩쓸어 버렸다. 이 시기에 맞춰 징기스칸으로 개명을 했는데 그 뜻은 세계정복자라 한다. 1219년 그는 70만 대군을 서쪽으로 돌렸다. 그는 파죽지세로 보카라, 사마르칸, 발크, 메르브(현재 모두 러시아 땅) 등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네이샤브르(Neyshabur, 이란 북쪽 도시)에서는 모든 생명체를 도륙하는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1227년 징기스칸이 죽기 전까지 가는 도시마다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면서 이란의 서부 아제르바이젠까지 이르렀다. 징기스칸이 죽은 후 잠시나마 숨을 돌렸으나 그의 손자 홀라구칸(Hulagu Khan: 1217~1265)의 등장으로 사태는 아주 험악해졌다. 1258년 그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최후의 아바스 칼리프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다드의 학자, 종교지도자와 시인을 대거 학살한 후 해골 피라미드를 쌓았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라크 관개시설 기술자들을 없애 버렸다. 수세기 동안에 만든 여러 가지 자료, 예술작품들을 모두 쓸어 버렸다. 이라크는 모든 것이 방치된 상태에서 몽고의 수도 이란 타브리즈의 지배를 받았다.

1335년 대몽고제국의 마지막 칸 아브 사이(Abu Said)가 죽은 후 이라크의 정치적 혼란은 지방 소규모 왕국인 자라이리가 집권 할 때까지 지속됐다. 자라이리는 15세기 초까지 통치했다. 자라이리의 통치는 사마르칸에서 왕자 자리를 되찾은 타메란(Tamerlane)-즉 새로운 몽고세력-의 간섭을 받게 됐다. 1401년 그는 바그다드를 약탈하고 주민을 대량 학살했다. 타메란은 수 천명의 이라크인을 죽였고 수 백개의 마을를 파괴했다. 타메란도 훌라구처럼 해골 피라미드를 즐기는 자였다. 그는 수니파에게 경건한 척 하면서 실제로는 이슬람학자를 없애 버리고, 이슬람 문화를 수도 사마르칸을 제외하고는 모두 말살해버렸다.

▲ 남부 이라크의 마쉬(습지대).

이라크는 몽고의 침략세력이 약화되자 정치적 혼란, 극심한 경제침체, 사회분열이 뒤따랐다. 오랜 동안 무역의 중심지였던 바그다드는 졸지에 상업적 역할을 상실했다. 상품 해상수송의 요충지였던 바스라도 포르투갈의 희망봉을 통한 짧은 항로의 발견으로 더 이상 필요없게 됐다. 농업부문에 있어서도 한때 집약적인 관계시설도 황폐해져 늪지대와 습지가 수없이 생겨나고 경작 할 수 없는 스탭지역 만이 기름진 삼각주 땅에 퍼져 나갔다. 농경사회의 급격한 붕괴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사회를 초래했다. 몽고의 침략시대가 끝날 때쯤 이라크 역사의 흐름은 도시에 기반을 둔 아바스문화로부터 강유역의 부족 유목민으로 전락해 20세까지 존속했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2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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