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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V)

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V)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2.03.0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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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만제국의 팽창연대

오스만 통치시대(1534~1918)

16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라크 역사는 이란의 사파위 왕조와 터키의 오스만 제국 사이에 계속된 전쟁의 결과에 따라 큰 영향을 받았다.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한 사파위왕조는 이라크를 두 가지 이유에서 탐냈다. 하나는 신성한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 카발라 등의 도시와 다른 하나는 아바스왕조의 기반이던 바그다드로서 각각 상당한 상징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오스만은 시아 이슬람이 아나톨리아(소아시아)에 널리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수니국가를 이라크에 세워 완충지역으로 삼으려 했다. 이와 같이 양국은 각각 다른 목적으로 1509년 사파위가 이라크를 점령한 이래 130여 년간 이라크를 사이에 두고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멈추질 않다가 마침내 1638년에 오스만 제국의 뛰어난 전술가이며 역동적인 무라드 4세(Murad IV)가 이라크를 확고히 수중에 넣었다.

▲ 무라드VI
오랫동안 양국의 충돌로 말미암아 이라크의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반목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오스만과 사파위는 수니와 시아 이슬람을 각각 자국 내 지지자를 동원하는데 자주 이용했다. 사파위 통치 때(1623~1638)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이라크 수니파에 속한 사람은 처참하게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이라크 시아파는 오스만이 지배하는 동안(1638~1916) 장기간 권력구조에서 배제됐다.

특히 수니파는 오스만의 장기 통치 기간 중 행정 경험을 습득해 20세기에 들어서 정치권력을 독점을 하게 됐다. 수니파는 새로운 경제, 교육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나 시아파는 정치 무대에서 제외돼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경제적으로 침체됐다. 1980년대 들어서도 시아-수니의 반목은 이라크 사회구조의 심각한 문제가 됐다.

17세기까지 오스만은 사파위와의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여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됐다. 이를 틈타 이라크에서는 부족 세력이 다시 일어나 지배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이라크의 역사는 부족의 이동과 부족 간의 충돌에 관한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반도 중앙 고원지대로부터(Najd) 베두인이 밀어 닥쳐 유목민이 크게 늘어났다. 베두인들이 침입해서 자리를 잡고 일단 눌러 앉으면 이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대규모이며 강력한 문타피크(Muntafiq) 부족연합은 사우디 메카의 수니파 가계인 사둔가의 지지하에 이라크 중부 및 남부에서 자리를 잡았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부족 샤말(Shammar)은 시리아를 거처 들어와 기존의 부족과 격돌했다.

티그리스 하류 아마라 근처에서 신흥 부족 세력인 바니 램이 자리를 잡았다. 북부에는 쿠르드 바반왕국이 일어나 반항세력을 구축했다. 이 반항 세력은 오스만이 이라크 쿠르드지역의 종주권 임명권한 행사조차 불가능하게 했다. 1625년부터 1668년까지 그리고 1694년부터 1701년까지 지방 종주권자가 바스라지역을 통치했고, 강력한 종주권자는 근본적으로 오스만의 바그다드 지배를 무시했다.

▲ 베드윈 샤말부족.
13세기 몽고침략 때부터 시작된 도시생활의 붕괴와 부족간의 전쟁이 반복되자 잠잠하던 맘루크가 다시 고개를 들게 됐다. 18세기 초 맘루크는 오스만과는 별도로 자신들의 권한을 주장했다. 그들은 바스라 통치를 시작으로 확장해 나가서 결국에는 페르시아만에서부터 쿠르드지역 산자락까지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통치하게 됐다.

맘루크는 유능한 행정을 펼쳐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을 가져왔다. 위대한 맘루크 지도자 슈레이만 2세(Suleyman the II, 1780~1802)는 법치주의를 도입하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 마지막 맘루크 지도자인 다우드(Daud, 1816~1831)는 중요한 현대화 계획에 착수해 운하를 정비하고, 산업을 일으키며, 군인 2만명을 훈련시키고, 인쇄를 시작했다.

맘루크시대는 1831년 대홍수와 전염병의 만연으로 바그다드가 황폐화됐다. 이는 오스만 술탄이 이라크 통치를 회복해 끝이 났다. 오스만의 통치는 불안정했으니 예를 든다면 바그다드 총독은 1831부터 1869년까지 10명 이상 교체됐다.

그러나 1869년 개혁성향이 높은 미드하트(Midhat) 파샤가 임명돼 오스만은 권한을 되찾았다. 미드하트는 즉시 서구모델에 따른 개혁에 착수했다. 미드하트 개혁은 탄지마트(Tanzimat)라 부르며 주요 목적은 군대를 재편하고, 형법과 상법을 제정하고, 학교체제를 종교와 분리하며, 지방행정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는 총독을 돕는 지방의회를 만들고, 선거를 통해 주요 도시에 시의회를 뒀다. 그러나 사무실 요원은 이라크의 대중과 유대가 별로 없어 주로 귀족들로 채워졌고 이라크인들이 행정 능력을 습득하는데 도움이 됐다.

▲ 탄지마트 개혁에 따른 오스만의 군개 재편.

미드하트는 13세기 이래 우위에 있던 부족세력을 도시의 정부 단체로 수립하거나 부족을 도시에 정착시켜 도시와 부족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시키려 노력했다. 오스만의 권한을 지방에까지 확장하려는 미드하트 계획의 주요 골자는 1858년 타푸 토지법(TAPU land law)이다. 이 새로운 토지개혁은 봉건제도의 토지 재산권, 농민세 등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 법의 의도는 부족장을 유인해내 정착시키고 정치적 역할을 주려는데 있었다.

실제로 타푸 법에 따라 부족장이 대지주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 부족원들은 새로운 법이 세금을 더 걷거나 강제 징수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려한 나머지 부족사회가 소유한 땅을 족장의 이름으로 등재하거나 도시의 토지 투기자들에게 팔아 넘겼다. 그 결과 부족장들은 점차 이윤을 추구하는 지주로 변하고 부족원은 가난한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미드하트의 또 다른 계획은 이슬람 성직자 교육제도를 일반 보통교육제도로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이 새로운 보통 교육은 어느 계급 출신 아이들도 상층 사회로 진입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줬으며, 이라크 지식계층의 성장을 가져왔다. 보통교육제도는 서양언어습득과 서양학문의 길을 열어 줬다.

이라크 학교에 서구학문이 도입되자 이에 따라 서구의 정치 및 경제 현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1802년 바그다드에 영국 영사관이 개설되고 그 후 얼마 안 있어 프랑스도 뒤 따랐다. 이라크 현대화에 대한 유럽의 관심사는 자신들의 상업적 편의 때문이었지만 오스만의 개혁 사업과 맞아 떨어졌다. 1869년 증기 기선이 강에 나타났고, 전신이 1861년에 도입됐다. 그리고 1869년에 스위스 운하가 개통돼 이라크는 유럽시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지주 부족장은 특수작물을 서구 자본주의 시장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1908년 새로운 정치 파벌인 터키 민족주의 개혁당 ‘영 투르크’(Young Truk)가 이스탄불에서 집권했다. 영 투르크는 서구 국가 모델에 기초한 통합된 민족국가인 오스만제국 중흥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1876년 헌법을 부활시켰으나 이 헌법은 통치자와 피 통치자의 권리가 정해져 있기는 했으나 통치자의 입장에서 제정됐기 때문에 아무리 좋게 바도 조금 약화된 전제군주주의 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총선을 실시하고 의회를 재개했다. 이라크 대표자는 비록 바그다드의 상류층만을 대변하지만 이스탄불에서 의회 경험을 쌓게 되어 훗날 자치정부 체제를 도입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 1908년 영 투르크 혁명.
이라크 역사에 있어 터키민족주의 개혁당(Young Truks)의 공격적인 터키화 정책은 이라크의 신흥 지식계급의 호응을 받지 못했으나 아랍의 민족주의 운동의 활기를 띄게 했다.

1908년 영 투르크 혁명의 자극을 받아 이라크 민족주의자 들은 정치활동을 한 층 강화했다. 이라크 민족주의자들은 카이로에서 오스만의 지방분권 당과 회합을 하고 일부는 아랍민족주의 단체(Young Arab Society: 오스만 통치하의 비밀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1913년 베이루트로 옮겨졌다. 아랍 민족주의자를 부추기는 서구 세력이 밀집해 있는 바스라는 민족주의자들이 자치권의 조치를 요구하는 온상이 됐다.

이라크는 거의 400년 장기간을 오스만에 통치 하에 있으면서도 민족국가를 형성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스만은 이라크 부족이 지배하는 반란을 억제하지 못하고 도시에서 조차 그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무능력한 오스만 정부는 이라크 자치정부와 자립적인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정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라크는 20세기에 들어서 현대국가 수립과정을 크게 지연시키는 복 잡한 사회 갈등 속에서 시달렸다.

가장 오래되고 뿌리깊은 갈등은 부족과 도시간에 식량 생산을 할 수 있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 평야의 쟁탈전이었다. 오스만 정부의 중앙집중화 정책은 특히 19세기에 유목민 사회와 치열한 투쟁의 부족정신에 직접적인 위협이 됐다. 부족과 도시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부족들 간에도 싸웠으며, 또한 엄격한 계층이 존재했다.

강력한 힘을 가진 부족은 ‘낙타계층’이라 칭하고 허약한 농부나 습지대사는 부족은 ‘양계층(羊階層)’이라 불렀다. 도시계층 또한 직업에 따라서 혹은 종파에 따라 극명하게 나뉘었다. 도시 자치구역 내에 특정한 조합이 생겨났고, 수니와 시아는 절대로 섞이지 않았다. 결국 쿠르드, 바스라, 바그다드 등의 지역이 이라크 영토가 됐지만 지역 간에 충돌은 더욱 많아졌다. 역사적으로 북쪽에 있는 모슬은 시리아와 터키에 기울었고, 바그다드와 시아의 성지 도시는 이란과 관계가 깊어졌다.

비록 오스만이 쇠약해 이라크 자립공동체가 성장토록 놓아뒀으나 오스만정부가 착수한 현대화 추진계획은 전통적인 자립집단을 와해시킨 반면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했다. 1869년 탄지마트(Tanzimt) 개혁을 시작으로 이라크 생존 경제의 대부분은 점차적으로 화폐에 기초한 세계자본주의와 연결된 시장경제로 변화해 갔다. 사회적 지위는 귀족 혈통, 싸움의 기량 또는 종교 지식에 의해 결정됐으나 이제는 자본주의 출현으로 사회적 지위는 점점 더 소유 재산과 부의 축적에 의하여 결정됐다.

이라크에서 오스만의 중요한 유산은 민족주의 정책과 강력한 주장을 하는 이라크의 소수 지식계층을 남긴 것이다. 서구 문명의 급속한 잠식에 직면한 영 투르크는 터키 언어와 문화를 강제로 따르게 하고,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여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터키화 정책은 아랍의 자치권 획득을 염두에 두고 초기에 동조하던 아랍 지식계층은 결국 등을 돌리고 말았다.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몇몇 민족주의 비밀단체가 결성됐다. 이런 단체 가운데 주요 단체는 알 하드(Al Ahd)이며 이 단체의 회원들은 모두 오스만 군대 이라크 장교 출신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즈음에는 회원이 급속도로 증가해 바그다드와 모슬에 4000명까지 늘어났다. 알 아드 같은 민족주의 단체 등이 존재했으나 그래도 이라크의 민족주의는 귀족과 중산층 이상의 교육받은 아랍인들 의 관심사였지 일반 대중은 소외됐다.
▲ 오스만제국의 쇠망.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2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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