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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VII)

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VII)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2.05.0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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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와 전쟁으로 불안한 정정(政情)

▲ 트랜스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이라크와 트랜스요르단(현 요르단)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다음해 1948년 연합군을 결성 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949년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됐다. 전쟁은 이라크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이라크 정부는 국가 예산의 40%를 전비와 팔레스타인 난민원조에 지출하고 있는 상황인데, 1948년 하이파(Haifa;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가는 송유관은 차단은 국가 수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더욱이 이러한 전쟁과 이라크 유대상인에 대한 교수형은 특히 번성했던 이라크 내 유대공동체 구성원들의 탈출을 조장했다. 이에 이라크 정부는 이민은 금지시켰지만, 수많은 유대인들은 이 시기에 지하조직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로 향했다.

결국 1950년 이라크 의회는 이스라엘 이민을 합법화했다. 같은해 5월부터 이듬해 8월 사이 유대인 단체와 이스라엘 정부는 에즈라 작전(Operation Ezra)을 통해 11만 명의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공수하는데 성공했다.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이라크 유대인 12만 명이 이스라엘로 이민을 했다.

▲ 에즈라작전
1950년대 중반 이라크 군주국은 일련의 외교정책 과오에 휘말렸고, 결국 국가는 전복 위기로 내몰렸다. 1949년 시리아에서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이라크와 연합을 반대하던 군부의 실력자인 아디브 시쉬클리(Adib Shishcli)가 권력을 잡게 됐다. 반면 이라크에서는 시리아와 연합을 원하는 아브 알 일라파측과 연합을 반대하는 누리 아스 사이드파측으로 양분됐다.

1954년 비록 시쉬클리는 이라크의 공작으로 타도됐으나 양국의 연합은 결코 결실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누리 아스 사이드와 섭정자(아부 알 일라)간에 불화는 더욱 심화됐다. 나약한 정부임을 알아차린 반대파의 반정부활동은 한층 격렬해졌다. 1955년 영국이 지지하는 이란, 파키스탄과 터키 상호 방위조약-바그다드조약-에 이라크도 가담한다고 누리 아스 사이드가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이라크 군주국은 외교정책상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다.

▲ 바그다드조약 동맹국
바그다드조약은 가말 압둘 낫셀(Gamal Abdel Nasser) 이집트 대통령에게 정면 도전으로 간주됐다. 이에 대응해 낫셀 대통령은 이라크 군주국의 합법성을 거론하며 자유 장교집단이 전복시켜야 마땅하다고 촉구하는 미디어 캠페인을 벌였다. 1956년 영국-이탈리아-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공격했다. 그리고 누리 아스 사이드는 그간 늘어난 반대파 집단으로부터 소외됐다.

1958년 2월 1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아랍공화국연합에 가담해 이집트-시리아연방을 결성하자 이에 대응하려고 같은 달 요르단 후세인 왕과 아브 알 일라(섭정자)는 하시미테 군주연방을 제안했다. 2월 12일 요르단-이라크 아랍연방 결성을 선포했다. 원하면 어느 아랍국가든 가입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누리 아스 사이드는 아랍 하시미테 연방의 셋째 번 국가로 쿠웨이트의 가입을 종용했다. 쿠웨이트 지도자 압둘라 알 사림을 바그다드로 초청해 영국으로부터 독립과 삼국연합에 관해 논의했다.

당시 영국은 쿠웨이트 독립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로 인해 이라크 군주국은 완전히 고립상태가 됐다. 누리 아스 사이드 정권은 국민들의 고조되는 불만을 단지 강도 높은 탄압과 보다 격심한 정치 탄압으로 겨우 유지됐다. 이집트 낫셀에게 고무돼 압둘 카림 카씸여단장과 압둘 살람 아리프의 지휘하에 19여단 내 자유 장교집단에 의해 동트기 전 재빠른 쿠데타로 하시미테 군주국은 1958년 7월 14일 전복됐다. 파이잘 2세 왕과 아브 알 일라는 알 리하브궁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그리고 시체는 궁 밖에 거꾸로 매달리어 대중에게 전시됐으며,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처형됐다. 누리 아스 사이드는 아랍의 히잡(여자베일)을 쓰고 도망치려다 하루 만에 잡혀서 처형됐고 그 시체는 묶어서 자동차로 시내 가두로 끌고 다녀 몸체는 흔적 없이 살아지고 다리 하나만 남았다.

이라크는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아랍연합은 해체됐다. 이라크는 연초에 이집트-시리아에 의해 결성된 아랍공화국연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카셈은 석유생산에 대한 간섭을 하지않아 서방측으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이라크의 바그다트조약에 대한 역할은 끝났다. 같은 해 아리프는 신임 수상 카셈을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59년 신 정부에 환멸은 느낀 모슬 수비대는 카셈에 대해 반란을 추진했으나 불만을 품은 아랍민족주의자와 바트당원이 대량학살 되는 등 이 반란은 무자비하게 탄압됐다. 이번에는 1959년 말경 바트당원이 주동이 되어 카셈 암살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했다. 실패한 암살단원 가운데에는 젊은 사담 후세인도 끼어 있었다.

▲ 압둘 카림 카카셈
카셈은 바그다트조약을 1959년에 끝냈다. 후에 중앙 Central Treaty Organization으로 재편했다. 카셈은 4년 더 권좌에 앉아 있었다.

낫셀주의자와 바트당원, 이 두 집단은 아랍공화국연합에 가입하기를 원했다. 공산주의자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카셈은 낫셀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좌파들과 직접 연합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 처사로 가장 강력했던 지지자들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카셈은 빈곤한 농민층과 중간 급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노동조합결성을 허가하며, 오랫동안 지속됐던 봉건토지제도를 끝내고, 공산주의 금지법을 철폐했다. 카셈은 또 이라크석유회사(Iraq Petroleum Company; 1929년까지 Turkish Petroleum Company로 불렸음)와 로열티를 올리려는 협상을 했다.

마침내 1961년 12월 공법 80호 법안이 통과됐다. 석유매장량은 국가소유로서 외국이 소유 관리하는 것은 무효라고 선포하고 외국회사에게 석유조광권을 불허했다. 동시에 이라크 정부는 적정한 대가를 지불하면 외국회사도 석유탐사를 할 수 있도록 협상의 길을 열어 놓았다. 카셈은 이라크 석유매장량 관리권을 이라크 석유공사(1966에 설립, INOC)에 이양해 주었다. 이 조치와 함께 내각에 공산주의를 동정하는 각료를 임명했기 때문에 미국은 공산주의가 정권을 인수 할 수 있겠다는 우려 속에 바트당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 이라크 공산당 심벌

1961년 쿠웨이트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카셈은 즉각 이 수장국(首長國)이 원래 오트만 시절 이라크의 바스라에 속한 성(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이곳의 통치권을 요구했다. 영국은 전임 보호국으로서 이러한 위협에 강한 반대를 하면서 여단병력을 파견해 이라크로 하여금 단념케 했다. 카셈은 주장을 굽히고 1963년 10월 쿠웨이트의 통치권과 국경선을 인정했다. 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는가 하면 재빠르게 다른 쿠데타가 또 일어났으며, 그에 따라 지도자도 등장과 퇴출이 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여러차례 일어나는 등 계속해서 혼란한 시기가 지속됐다.

수상인 아메드 하산 알 바크르장군(Gen. Ahmed Hasan al-Bakr)과 대통령인 압둘 사람 아리프대령(Col. Abdul Salam Arif)지휘하에 바트 아랍사회주의당이 정권을 잡았다. 그 후 1963년 2월에 카셈은 암살됐다. 9개월 후 아리프 대통령은 바스당 노선 추구자들에게 대항하는 쿠데타에 성공해 바트정부를 축출했다. 1966년 4월 13일 헬기 추락으로 사망했고 그의 형제인 압둘 라만 아리프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67년 6일 전쟁(아랍권과 이스라엘전쟁) 후 바스당은 충분한 힘을 축적해 바스당 노선 추구자들은 1968년 7월 17일 아리프를 타도하고 재집권했다.

▲ 6일 전쟁 전 후 이스라엘 영토
바스당 노선 추구자들이 재 집권하자 아메드 하산 알 바크르가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혁명 명령위원회의 의장이 됐다. 이 시기의 이라크 일반 정책은 아랍민족주의였다. 이라크는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당시 아랍군의 선두 역할을 했고, 1973년 해방 전쟁 때는 시리아에 원조를 했다. 이라크는 분쟁을 종식시키는 정전에 반대했다. 70년대 초 대 이란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이란 무기가 쿠르드 지도자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에게 공급되자 (쿠르드 반란은 1961년 처음으로 일어남) 현재 진행 중인 쿠르드 반란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문제는 국경 분쟁과도 마주 물려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나 1975년 3월 6일 알제리아에서 사담 훗세인이 이란의 샤와 알제리아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샤텔아랍강의 국경분쟁이 해결됐다. 그대신 샤는 쿠르드 반란분자들에게 무기원조를 중단하여 반란이 점점 식어 갔다.

1977년 말 까지 쿠르드사람들의 자치제가 허락됐고, 쿠르드어가 공식언어로 인정됐다. 정치적으로 이라크는 안정됐고, 70년대의 석유 호황으로 경제 또한 극적으로 치솟았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2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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