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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Ⅷ)

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Ⅷ)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2.06.0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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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과 쿠웨이트 침략

1979년 7월 아메드 하산 바크르 이라크 대통령이 선발된 계승자 부통령인 사담 후세인으로 교체돼 그가 이라크의 진정한 통치자가 됐다. 사담은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고 대내적으로는 공석 중인 군 요직과 숙청된 정적(政敵) 마저 일일이 챙겼고 대외적으로는 이란을 제무로 적대감정을 고조시켰다. 즉 1980년 9월 17일 사담은 이라크/이란 간에 체결한 국경협약(알제리 조약)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샤트 알 아랍을 모두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 1937. 4. 8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선언을 한지 5일만인 1980년 9월 22일 양국간에 전쟁이 일어나 장장 8년이나 지속됐다. 이 전쟁은 양국경제에 크나 큰 타격을 주었다. 양국은 8년 간의 격전을 치르고도 어느 쪽도 한치의 땅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국경 또한 변하지 않았지만 100만 명이 넘는 아까운 생명만을 희생시켰을 뿐이다.

이라크와 이란 간의 전쟁이 8년 차에 접어든 1988년 3월 16일(수요일) 사담의 사촌 알리 핫싼 알 마지드 (Ali Hassan al-Majid)는 이라크 동북부의 이란접경 지역에 있는 이라크 쿠르드 마을 할라브자(Halabja: 바그다드 북동쪽 240km에 위치한 이란 접경 도시)를 겨자가스와 신경가스인 독가스를 살포해 집단학살을 은밀이 자행했다.

여러 가지 사망자의 추정치가 나돌았으나 국제인권감시단체(Human Rights Watch)는 사망자를 5000명까지 보고 있다. 사담 후세인은 자기 국민에게도 생화학무기를 사용했다. 할라브자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을 거부하는 쿠르드족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곳 주민 대부분은 페시메르가(Peshmerga: 이라크 소수 민족지역인 쿠르디스탄의 민병대, ‘죽음 앞에 그들’이라고도 한다.)를 지지했다. 1988년 미 의회가 제재를 가하려고 했으나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 1988. 3. 16 살포한 할라브자 독가스 희생자.

1988년 7월 이란은 유엔 598호 휴전 결의안의 조건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1998년 8월 20일 전쟁은 드디어 끝이 났다. 이라크는 경제회복의 시간조차 갖지 못하고 1990년 종전 2년 만에 쿠웨이트를 침공해 또 다시 전쟁 판을 벌였으니 이는 해묵은 영토 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석유 자원을 확보하려고 이라크 국경을 침범했다고 주장이다. 1990년 7월 17일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와 UAE가 세계석유시장을 범람시켜 유가를 하락 시킨다고 비난했다. 더욱이 쿠웨이트를 찍어서 국경분쟁지역인 루말리아 유전(이라크와 쿠웨이트 국경지역에 위치: 지상에서는 유전의 경계선이 명확하나 땅속의 매장량은 구분을 할 수 없음. 이런 경우 양측은 생산을 협의해야 함.)에서 일방적으로 생산한다고 했다. 그러하니 부채(이란과의 전쟁에서 쿠웨이트에 진 빚) 상환을 연장하라고 요구했다.

▲ 내전 후 양대세력의 지배 구역
1990년 7월 쌍방이 직접 협상에 들어갔으나 처음부터 성사되리라고 보지 안았다. 그리고 한 편에서는 미국은 양국의 국경 분쟁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재 확인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담 후세인과 주 이라크 미 대사인 에일프릴 글라스피(April Glaspie가 1990년 7월 25일 회의에서 협의된 것이다.) 내용은 미국이 중동의 국경 분쟁에 개입할 이유가 없으니 후세인에게 알아서 하라는 본국의 메시지를 미 대사가 사담에게 전한 것이다.

1990년 8월 1일 사우디아라비아 젯다에서 아랍 중재인은 협상을 통하여 이라크와 쿠웨이트 간의 이견을 좁히려 했으나 첫 회의 중에는 단지 비난과 역 비난만이 난무했을 뿐이며, 2차 회의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개최키로 했으나 바로 다음 날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략했다. 이라크 군대는 1990년 8월2일 자정을 조금 지난 시간에 이미 쿠웨이트 영토 내에 들끓었다. 미국은 관여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에 반해 즉시 사우디 안전에는 관심이 있다고 선언했다.

▲ 사담과 글라스피 미 대사와 첫 회담(가운데는 통역).
유엔 안보리와 아랍연맹은 즉각 이라크의 침략을 맹비난했다. 나흘 후 안보리는 이사회를 열어 거의 모든 무역이 정지되는 전면 금수조치를 취했다. 이라크는 이 경제 제재에 대응해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성(省)이라고 선포하고, 측근인 알 마지드 장군을 점령지 쿠웨이트 총독으로 임명함으로써 망명 중인 쿠웨이트 왕족인 사바가족들로 하여금 강력한 국제적 반응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그 후 몇 개월에 걸쳐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을 규탄하고, 이라크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 제재의 실천을 위한 의무조항 등 일련의 결의안을 의결했다.

1990년 11월 유엔 안보리는 모든 회원국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허용하고,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 군에 맞서 군사작전 전개를 재가했으며, 그리고 1991년 1월 15일까지 완전철수를 요구하는 678호 결의안을 채택했다. 사담 후세인이 요구조건에 불응하자 바그다드에 항공기 폭격을 가했다. 이로써 미국이 이끄는 28개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의 걸프전(사막의 폭풍작전)이 시작됐다. 이 전쟁은 단지 6주 만에 끝나 이라크의 처참한 꼴을 보여주었다. 자그만치 14만 톤의 총탄이 강토에 퍼부어졌다. 이 규모는 히로시마 원폭의 7배에 달한다.

▲ 1946년 3월 히로시마의 처참한 모습.

아마도 많게는 10만명 이상의 이라크 군대가 사망했고, 수천 수만의 민간이 죽었다. 연합군의 공중 폭격은 도로, 교량, 공장과 석유산업시설을 파괴했다. (정유시설과 유통시설은 폐쇄됐다.) 그리고 전기, 전화, 급수 업무 등이 크게 저해됐다. 대형 회의장, 상가와 거주지역도 폭격했다. 수백 명의 이라크인이 알 아미리야 방공호 속에서 레이저 유도 스마트탄 공격으로 죽었다. 전력이 없이는 정수와 하수처리가 불가능해 오염된 수질로 인한 질병이 만연했다.

1998년 2월 28일 미국에 의하여 정전이 선포됐다. 유엔의 영구 정전 조건은 4월에 이라크가 수락했다. 그리고 엄격한 조건 즉 비축한 모든 무기를 공개하고 파괴하라고 요구했다. 종전 후 몇 일만에 이라크 남부에 반란이 일러났고, 북쪽에서는 쿠르드족이 반란을 일으켜 그 지역 마을을 대 부분을 장악했다. 미국(아버지 부시)은 또 반란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반란자들만 노출돼 희생됐다.

사막의 폭풍 속에서 살아남은 공화국 수비대는 바스라, 나자프, 카르발라 등 지에서 아주 잔인하게 행동했다. 남부 도시의 반란자들은 바트당 간부, 보안기관원과 정부 협력자를 살해했다. 이라크의 헬리콥터와 군대 동원되어 그 동안 쿠르디스탄에서 반란 자에게 빼앗겼던 도시를 탈환했다. 1988년 독가스 공격의 공포가 되살아나 이곳의 쿠르드족은 터키와 이란 국경으로 대 탈출이 감행되어 4월까지 250만 명의 피란민이 발생했다. 1991년 4월 하순에 쿠르드 평화 계획 실천을 위한 협상을 했으나 쿠르드족이 킬쿡(유전지대)을 포함시킨 쿠르드 자치구가 설정돼야 한다고 주장해 진전을 보지 못했다. 미국은 집단학살 방지책으로 북쪽 위도선 36과 남쪽위도선 32 간의 비행제한구역을 선포했다.

크린턴 행정부는 1993년 6월 27일 쿠웨이트에서 군사적 대응을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혐의를 포착했다. 이를 빌미로 바그다드에 있는 이라크 정보본부를 겨냥하고 홍해와 아라비아 걸프만에 있는 미국 군함으로부터 23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 중 3개의 미사일이 목표물에서 벗어나 근처의 주거지역에 떨어져 8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무력 분쟁은 두 쿠르드당 간의 경쟁을 조장했다. 1990년대 초 쿠르드는 빈번히 지배구역 대한 분쟁을 일으켰고, 정치 경제의 보안은 악화됐다. 이러한 분쟁은 더욱 격심해지면서 1994년 5월 쿠르드애국 연합과 쿠르드 민주당 간의 충돌은 300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그 후 2년 동안 여러 차례 충돌이 일어나 결국 내전으로까지 번졌다.

▲ 내전 후 양대세력의 지배 구역.
1996년 8월 쿠르드 민주당(KDP: Kurdistan Democratic Party)은 후세인에게 전쟁에 관한 인터뷰를 청했다. 후세인은 쿠르드 애국 연합(Patriotic Union of Kurdistan)의 거점으로 미국보호하에 있는 아르빌 지역에 3만 여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쿠르드 민주당은 즉시 세력이 구축됐다. 이에 맞서 미국은 두발의 미사일로 이라크 남부를 때렸다. 그러나 9월 상순에 이라크는 쿠르드 민주당을 지원하여 쿠르드 애국연합의 또 하나의 거점인 수라이마니아를 점령했다.

1994년 10월 이라크는 공화국 수비대를 쿠웨이트 국경 쪽으로 이동시킨 적이 있는데 이는 이라크의 군사 행동을 단념시키려고 걸프에 배치된 미국 군대의 반응 보려는 행동이었다. 이 이동은 계속되는 유엔의 제재에 대한 사담의 좌절감의 표출이라고도 해석됐다. 그러나 그는 결국 쿠웨이트의 존재와 현 국경을 인정하고 중간 노선을 취했다. 그 후 몇 개월 동안 그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군 내부와 정부의 핵심 구성인 부족 및 씨족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그의 지위는 한층 불안정해졌다. 6월 이 정권의 고위직에 많이 진출한 두라미부족 한 명을 비밀리에 사형을 집행하여 충돌이 일어 났다. 이 충돌은 사담의 아들 우다이 지휘하에 군대가 라마디 마을의 반대자들을 무참히 억압하며 막을 내렸다. 이에 반발하여 두라임 부족 지배 하에 있는 반체제 군부대가 아브 그레인 교도소를 공격했다.

1995년 5월에 의복 형제이며 내무장관 와트반을 해고하고, 7월에 쿠르드족에게 독가스 작전을 펼쳐 ‘케미칼 알리’라고 불리우는 악명 높고 막강했던 국방장관을 강등시켰다. 이러한 인사 조치는 그의 두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가 핵심 권력을 점차 장악한대 기인한다. 즉 1995년 5월 우다이에게 부통령의 권한을 부여 했다. 그들 부자가 자신들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을 제거한 큰 이유는 사담은 직계 가족의 보호가 더 안전할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8월에 후세인 카밀 하산 알 마지드, 국방산업장관이며 심복인데다가 사위인 자가 부인(사담의 딸)을 데리고 요르단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의 또 다른 딸과 결혼한 자기 형에게도 조국을 버리고 망명하라고 종용했다. 사담은 망명자가 폭로 하기 전에 대처하고자 유엔위원회의 이라크 무장해제에 전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정권은 외부의 반대 세력이 약화 되면 상대적으로 내부 또한 약화되기 쉽다. 즉 후세인의 외부 반대세력은 분열이 일어나고, 저마다 효과적인 방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하며 약화되었고 내부세력 또한 약화됐다.

이와 때를 같이해 불란서와 소련은 유엔 제재를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그 이유는 이란과의 전쟁 시 무기 판매 대금을 회수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이라크에 대한 압력이 지속돼야 한다는 미국의 결심은 확고했다. 어느 경우에도 이라크 정권의 약화가 확실하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 했다. 특히 두 망명자는 귀국해서 사형에 처해 졌고, 망명의 잠재성이 있는 부족에게는 끔찍한 경고가 내려졌다. 실제로 1996년까지 유엔 경제 제재를 종식시키지 못한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사담의 권력은 상당히 강화돼 있었다.

미국의 이라크공격

2002년 1월 29일 아들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이란과 북한을 포함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했다. 이 언급은 백악관이 사담 후세인을 반대하고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조치를 지원한다는 내용을 수사법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후 몇 개월 동안 부시 행정부의 고위직은 공개석상에서 자주 정권의 변화와 제한 없는 무기 사찰과 대량 살상무기의 폐기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이라크는 미국이 석유를 통제하고 이스라엘의 이익을 챙기려고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다.

2002년 9월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게 유엔 결의안의 준수를 촉구하며 이는 피 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부시는 사담이 화학 및 생물학적 무기와 핵무기 계획을 포함하여 16개의 유엔 결의안을 반복적으로 위반했다고 했다.

이라크 정부관리는 부시 대통령의 주장을 부인했다. 11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만장 일치로 1441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 안은 이라크는 30일 기한 내에 현재 추진 중인 모든 군사계획을 정확하게 누락 없이 완전하게 안보리에 보고하고, 바그다드는 유엔 무기 사찰단에게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화학, 생물학, 핵 등의 무기 생산이 의심되는 곳을 접근 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그리고 안보리는 이미 수차에 걸쳐 반복적으로 경고했는데도 계속적으로 위반한다면 중대한 국면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상기 시켰다.

이라크가 결의안에 동의해 11월 26일 조사요원은 이라크조사에 복귀했다. 이 결의안은 또 12월 8일까지 안보리에 대량살상무기의 명세를 제출하도록 요청했다. 이라크는 어떠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부정하고, 이 결의안은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 공격에 착수하려는 욕망의 결과라고 했다.

2003년 3월 17일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과 그의 아들에게 48시간 내에 이라크를 떠나라고 하면서 이 선택여부에 따라 군사 작전이 전개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사담은 자신과 아들이 3월 20일 (목요일)까지 떠나지 않으면 군사작전을 감행한다는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이라크혁명 명령 위원회는 이라크 TV 방송을 통하여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최후 통첩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우리는 미국이 주도하는 공격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2003년 3월 20일 (목요일) 오전 5시45분 홍해와 걸프만에 있는 미국 군함에서 40개 이상의 위성유도 토마호크 크루즈미사일을 바그다드에 발사했다. 즉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은 연합군이 이라크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펜타곤의 “목 베기 공격”(decapitation attack)이 시작됐다.

▲ 2차 걸프전의 연합군 작전계획.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2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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