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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석유산업의 흐름

이라크 석유산업의 흐름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2.07.0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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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석유회사(Turkish Petroleum Company)

1912년 유럽 석유회사들이 조광권을 얻어 이라크 석유개발 목적으로 연합해 터키석유회사(Turkish Petroleum Company, TPC)를 설립했다. 이 회사 설립의 또 다른 목적은 파트너들간의 경쟁을 지양하고, 미국 석유업자를 배제하려는데 있었다. 회사의 소유주는 대규모 유럽회사로 도이치뱅크, 앵글로색슨석유회사(로열 더치셸의 자회사), 터키국가은행(영국계열)과 개인 굴벤키안이었다.

칼루스 굴벤키안(Calouste Gulbenkian)은 영국 은행관계자의 추천을 받아 TPC의 가이드역할을 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인으로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석유공학을 전공했다. 지식이 풍부하고 무엇보다 터키 정부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 발탁된 것이다.

그는 1902년 영국시민권을 획득한 후 로얄더치/쉘 합병 등 여러 흥정에 관여했다. 그는 일을 성사시킨 후 언제나 지분 5% 요구해, ‘미스터 오프로(Mr. Five Percent)’라는 별명이 붙었다. “작은 파이에서 크게 떼어 먹는 것보다 큰 파이에서 작게 먹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그의 사업 철학이다. 그는 당대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세계 제일가는 예술품 수집가였다. 수집한 예술품으로 파리에 박물관을 차렸다. 지금도 그 박물관은 건재한다.

▲ 칼루스 굴벤키안(Mr. Five Percent).

TPC의 설립 목적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안고 있어 주주들간에 경쟁을 막지 못했다. 메소포타미아는 인도로 향하는 군사적, 상업적 길목으로 영국의 오래된 전략적 요지다. 그리고 영국은 1차 대전에 군함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교체키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관심도는 더 한 층 높아졌다.

따라서 1914년까지 앵글로 페르시안 오일을 조정하는 영국정부는 TPC 지분 50%까지 매입했다. TPC 설립 배후에는 굴벤키안이 있었고, 설립 후 대주주는 영국정부가 조종하는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회사가 있어 운영권은 영국이 행사했다. TPC는 오토만 정부로부터 조광권 부여를 약속받았으나 1914년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모든 계획은 중단됐다.

1차 대전은 강대국에게 석유자원 확보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1920년 영불 산레모 회의에서 메소포타미아(이라크) 석유개발을 하려고 어느 회사가 설립돼도 영국의 조정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이라크가 원하면 20%까지 지분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프랑스는 적산(敵産)으로 압수된 독일 도이치뱅크 지분을 요구했다.

결국 프랑스국책회사 CFP(Compagnie Francaise des Petroles)를 설립하고 그 지분을 차지했다. 이태리와 미국 정부는 자국의 회사가 배제된데 거세게 항의했다. 오랜 시간동안 첨예하고 반복적인 외교 협상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미국석유회사는 터키석유회사 지분 매입의 허락을 받았으나 완전한 타결은 1928년에나 이루어졌다.

1차 대전 후 오토만 터키가 멸망하고, 1920년 이라크는 영국 통치하에 있었으나 독점적 조광권이 TPC에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전 터키정부의 약속을 내걸어 1921년 TPC는 협상을 재개했다. 주요 쟁점은 산레모회의에서 결정된 20%의 이라크 참여지분이었다. 1920년대 초 이라크의 경영참여를 대부분 반대했다. 영국정부가 이라크의 주식 참여를 위해 압력을 넣었으나 TPC 주주는 이라크의 참여권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925년 TPC는 마침내 조광권을 승인받았다. 많은 이라크 사람들은 사기를 당했다고 느꼈다. 조광기간은 75년이고, 조광 구역은 24개 광구가 포함돼 있었다. 이라크 정부는 로열티를 톤당 정액으로 영국 파운드로 받게 됐으며, 파운드화의 평가 절하시에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조항이 들어 있긴 했다.

로열티 지불은 회사의 이익과 결부돼 있으나 단지 20년 후에 이 조문이 발효하게 돼 있었다. 이라크 정부는 TPC에 다른 산업체와 같은 세율을 부과하는 조세권을 가졌다. TPC는 내수용 정유공장 건설과 수출용 송유관을 건설하려고 했다. 또 이라크 정부는 석유 탐사와 생산을 위해 다른 광구를 분양할 수 있으며, TPC도 추가적인 광구 입찰에 응찰 할 수가 있었다.

1927년 석유를 발견하다

TPC는 이라크 정부로부터 조광권을 획득한 후 1927년 4월 첫 탐사 시추를 시작했다. 시추공 중 하나인 바바 구르구르는 쿠르드 지역의 킬국북쪽 10km 지점에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수 천년 전부터 가스와 경질 석유가 지표로 분출됐다. 알렉산더 대왕도 이 광경을 인상 깊게 보았다고 전해진다.

1927년 10월 15일 오전 3시 바바 구르구르에서 엄청난 가스와 석유가 분출됐다. 42미터나 되는 유정탑(油井塔) 위로 기름샘이 치솟았다. TPC는 크나큰 환경문제에 직면했다. 시꺼먼 원유가 굽이쳐 땅 위를 휩쓸고 지나가며 지역주민의 재산을 파괴하고 막대한 수질오염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정(油井)은 움푹 패인 곳에 세워졌고, 주변의 물은 낮은 데로 흘러 확트인 사막으로 흐르게 했는데 바로 이 물길을 타고 와디(우기 때 외에는 물이 없는 수로)로 흘러 들어갔다.

주변 마을은 물론 키르쿠크시까지도 홍수와 같은 원유 물결에 잠길 위험에 처해졌다. 이와 같은 원유 분출은 당시의 기술로는 즉시 멈출 수 없었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어떻게 원유를 가두어 놓느냐가 문제였다. 결국 1.5km 떨어진 저지대에 24km 달하는 댐을 쌓으면 약 1주일의 생산량을 담아놓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댐을 건설하려면 2000명의 노동자가 필요할 것으로 예측했다. 인근의 두 부족을 합쳐도 부족해 키르쿠크에서도 모집했다. 일부는 트럭으로 수송했으나 대부분 걸어서 모여들었다. 가장 먼 곳은 60km에서도 걸어왔다.

▲ 분출 후 통제 불능으로 흘러 내리는 원유.
밤에는 가스 기포로 인해 움푹 패인 낮은 지역에 푸른 안개가 서렸다. 이 움푹 패인 지역으로 유독가스가 결집됐으며 이로 인해 시추공원 2명과 이라크 노동자 3명이 질식사했다. 기술자들은 유정통제 장치(분출원유 통제장치)를 설치하려고 거의 무방비 상태로 마스크만 쓰고 일을 했다.

가을 날씨라 바람 한 점 없어 원유는 유정탑과 시추장비 위에 비구름이 내려앉듯이 원유비가 내렸다. 자욱하게 덮인 원유비를 불어 내면서 정두(井頭 well head)에서 작업했다. 이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항공발동기로 찬 바람을 일으켜 원유비를 불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분출이 있은 지 열흘 만에야 제어 밸브를 잠그고 원유 분출을 막을 수 있었다. 원유분출을 막기 전까지 하루 9만5000 배럴의 원유가 사막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우기가 다가 옴에 따라 또 다른 재앙의 공포가 감돌았다. 비가 내려 와디가 넘쳐나면 원유가 이를 따라 강으로 흘러내려 전국의 강으로 번질 수 있어 모든 강 수원을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펌프가 긴급 설치되어 원유를 유정으로 다시 집어넣으려 시도 했으나 시원치 않았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원유를 제거하려는 마지막 방법으로 상당량의 원유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비가 내릴 때쯤에는 깨끗이 정리됐다. 주변정리는 8개월이 지난 1927년 크리스마스에야 끝이 났다.

석유가 발견되자 주주구성과 TPC 역할에 관한 협상을 서둘렀다. 1928년 주주들은 정식 계약에 서명했다. 앵글로 페르시아 오일, 더치 셀 그룹, 불란서의 CFP, 근동개발주식회사(미국의 5대 회사를 대표) 등이 각각 23.7%를 보유하고 잔여 5%는 투표권 없이 굴벤키안이 보유했다. TPC는 이익을 내지 않는 회사로 조직돼 영국에 등기됐다. 다만 모회사를 위해 관리 운영비를 받아 지분에 따라 석유를 생산 분배했다.

TPC의 사업 범위는 모회사와의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이라크 내에서 필요한 정유 및 판매만으로 국한됐다. 앵글로 페르시아오일은 26.3% 지분 포기의 보상으로 총생산량의 10%의 로열티를 받았다.

미국회사가 직면한 주요 장애 요인은 1914년 TPC를 재조직하면서 서명한 계약의 한 조문 즉 어느 주주든 오토만 터키 영토 내에서 석유사업을 할 경우 주주들간에 지분을 분배해야 한다는 조문이다. 굴벤키안이 동 조문을 고집하기 때문에 다른 회사를 설립할 경우 그를 배제 할 수 없으니 그의 이권 주장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 계약은 1928년 주주 재편성 시에도 지속됐고 급기야 붉은 펜으로 살아진 오토만 영토 지도에 그어졌다. 이것이 레드라인 계약으로 알려졌다. 즉 지금은 살아진 오토만 제국의 국경(Red Line) 내에서 어느 TPC 파트너도 독립적 행동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이 레드라인은 2차 대전 종전까지 미국 파트너를 비롯한 여타 파트너의 페르시아 걸프지역 내에서 독자적인 광구 취득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이 계약에 관해 전 IPC 직원이며 작가인 스테판 롱그리그(Stephen Hemsly Longrigg)는 이와 같이 서술했다. “레드라인 계약은 여러 가지로 평가된다. 애석한 경우로는 잘못된 카르텔이며, 한편으로는 국제적 협력과 정당한 분배의 좋은 예이다.” 어찌됐던 20년 동안 그 넓은 중동 지역을 장악해 석유개발의 양식을 결정하고, 생산량을 조정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바레인에서 아람코(ARAMCO)와 밥코(BAPCO)가 우세한 것과는 달리 IPC는 레드라인 내에서 이 기간 동안 석유 탐사를 독점했다. 이 계약은 1948년 두 미국파트너가 계약을 깨면서 끝이 났다.

▲ 레드 라인 계약(쿠웨이트는 제외).
그러나 크나 큰 손실을 본 것은 석유 자원을 보유한 이라크였다. 산레모회의에서 이라크가 원 할 경우 20%를 참여 하도록 명문화 됐으나 석유회사들이 반대해 영국 정부가 압력을 가했음에도 결국 이라크 참여는 실패로 끝났으니 석유제국주의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이라크 석유회사(IPC)와 생산 지연

1929년 TPC는 IPC(Iraq Petroleum Company)로 개칭됐다. IPC는 다양하고, 때로는 이해가 엇갈리는 관계자들이 모인 국제 석유회사다. 1925년 3월 24일 부여 받은 광구는 이라크 전역이었으나 IPC는 조속한 광구개발을 꺼려했다. 그리고 전광구의 불과 0.5%에서만 생산을 했다.

1930년대 대공황시절 석유는 세계적으로 넘쳐나는데 여기에 이라크에서 대대적으로 생산한다면 단지 가격만을 최저 수준으로 하락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지연 전술은 시추와 개발사업에서 뿐만 아니라 송유관부설을 위한 관로(管路) 협상에도 적용됐다.

▲ 이스라엘 북부, Carmel산 부근의 지중해 연안에서 Jordan강에 이르는 에스드라엘론 평원.

IPC의 주주들 간에는 상반된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다. 앵글로-페르시안 오일, 로열 더치/쉘, 스탠더드 오일 등은 이라크 이외 지역에서 상당한 석유 공급원을 가지고 있어 이라크석유를 예비자원으로 보유하기를 원한 반면 CFP와 여타회사는 제한된 석유자원 밖에 없어 조속한 개발을 촉구했다. 이 상반된 이해관계는 이라크 석유개발을 지연시켰다. 결국 IPC 조광권은 그 유지에 필요한 요구사항 ? 예를 든다면 송유관과 저장시설 건설 - 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끝이 났다.

1931년 조광권은 재협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조건은 기간 70년, 면적은 티그리스강 동쪽 8만3200㎢가 주어졌다. 그 대신 이라크 정부는 추가적인 차관과 지중해 연안까지 연결하는 2개의 송유관을 1935까지 완공하겠다는 IPC의 약속을 받았다. 이 송유관은 CFP가 오랫동안 자국으로 석유를 빨리 수송하려던 숙원 사업이다.

▲ 하이파(북부 이스라엘의 제1도시) 소재 IPC 원유 저장소.
지중해 연안에 각각 다른 2개의 송유 관로(管路)와 저장소를 갖게 된 것은 프랑스가 북쪽의 시리아와 레바논을 지나 레바논 트리폴리에 저유소를 두는 것을 선호했고, 영국과 이라크는 남쪽을 통해 당시 팔레스타인의 하이파에 저장소를 원했기에 결국 서로 타협하여 각각 원하는 노선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이 두 송유관은 각각 연간 200만톤의 송유능력을 가졌다. 북쪽선은 856km이고 남쪽선(모슬-하이파)은 1000km에 이른다. 1934년 키르쿠크-하디타(바그다드 북서부 240km에 위치) 간의 송유관이 부설됐고, 여기서부터 트리폴리와 하이파 두 지역으로 갈라져 송유됐다. 1938년 석유 발견 9년 만에야 비로서 IPC는 상당량의 원유수출을 할 수 있게 됐다. 키르쿠크 유전의 생산량은 2차 대전까지 연평균 400만 톤이었으나 지중해로의 유조선 운항이 제한을 받아 생산량은 급격히 감소됐다.

비록 이라크 정부가 광구 분양을 개방해 다변화하려고 시도했으나 새 광구를 취득하려는 회사를 IPC가 매입해 버렸다. 그리고 모슬석유회사(Mosul Petroleum Company의 이름으로 티그리스강 서부와 위도 33도까지의 지역의 조광권을 확보했다. 1938년에 IPC는 자회사인 바스라 석유회사(Basrah Petroleum Company)를 설립해 황금 같은 이라크 남부 지역의 조광권마저 손아귀에 넣었으니 새로운 참여자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2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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