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라크 석유산업의 흐름(2)

이라크 석유산업의 흐름(2)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2.08.01 16:23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IPC 동업자간의 분쟁

이라크 석유회사(IPC: Iraq Petroleum Company) 동업자 그룹 간에는 △앙그로 이라니안(영국회사) 로열티 개정 건 △세금문제 △레드라인 계약의 종말 등 세 가지 문제로 오랜 기간 동안 협상을 벌여왔다.

앙그로 이라니안 로열티 개정 건 - 1925년에 취득한 이라크 석유개발권이 1935년 개정 될 때 티그리스강 동쪽 지역 8만3000㎢에 대해 포괄적인 개발권을 승인 받았다. 기존의 앙그로 이라니안 로열티 10%가 새롭게 확장된 지역에 적용되는가? 장기간 협상 끝에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7.5%를 현물 로열티로 주기로 합의했다.

세금문제 - IPC는 영국 법에 의거 설립된 영국계 회사이기 때문에 이중과세를 하지 않았으나, 비 영국계 그룹은 영국정부와 자국정부에 세금을 납부하는 이중과세를 면치 못했다. 결국 동업자 그룹은 송유관 운영권을 IPC에 넘겨주고, 원유가격을 원가 톤당 1실링의 이익을 가산해 영국 소득세 산출 세원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이 계획대로라면 IPC의 이익은 명목상이며, 영국정부에 대한 세금부담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다.

레드라인 계약의 종말 - IPC에 속한 두 미국 석유회사가 사우디 아라비아 석유를 개발하려고 아람코(ARAMCO)와 제휴하겠다고 제안했다. IPC의 다른 파트너는 레드라인계약에 예외를 둘 수 없다고 반대했다. 미국회사의 요청사항은 2차대전이 그 계약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굴벤키안의 법정 투쟁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정에서 판정을 내려 미국회사는 아람코에 가담하게 되었다. 프랑스정부와 굴벤키안은 IPC 생산량을 좀더 얻어내는 반면 소송을 철회했다. 그리고 레드라인은 사우디 아라비아, 예멘, 바레인, 이집트, 이스라엘과 요르단 서부 반을 제외 하고 다시 그어졌다.

IPC의 이라크 이외에서의 활동

레드라인계약에 따라 이라크 이외 지역 활동무대가 정해져 있어 IPC는 중동의 여타 지역을 찾거나 또는 개발하려는 각 지역마다 계열회사를 설립해야만 했다. 이 회사는 확정된 지역에 관한 단순한 탐사권 또는 탐사와 생산을 겸한 석유개발권을 통치자로부터 획득했다. 1948년까지 12개의 IPC 계열사가 설립돼 석유개발권과 탐사권을 획득했다.

※12개의 IPC 계열사
• 석유개발(사이프러스 회사) Petroleum Development(Cyprus Ltd.)
• 레바논석유회사 Lebanon Petroleum Company Ltd.
• 석유개발(팔레스타인) Petroleum Development(Palestine)Ltd.
• 시리아석유회사 Syrian Petroleum Company Ltd.
• 트랜스요르단석유회사 Trans-Jordan Petroleum Company Ltd.
• 모슬석유회사 Mosul Petroleum Company Ltd.
• 바스라석유회사 Basrah Petroleum Company Ltd.
• 석유개발(카타르회사) Petroleum Development(Qatar)Ltd.
• 석유개발(트루시알 코스트) Petroleum Development(Trucial Coast)
• 석유개발(오만 및 도하르) Petroleum Development(Oman and Dhofar)Ltd.
• 석유조광회사(아덴보호령/현예맨) Petroleum Concessions Ltd.(for the Aden Protectorate)
• 석유개발(서 아라비아) Petroleum Development(Western Arabia)Ltd.

1933년 IPC는 사우디 아라비아 알-하산지역의 석유광구개발협상에 참여해 소칼(SOCAL: Standard Oil of California)과 맞서 광구 입찰에 응찰했다.

이를 위해 영국군 출신 총독이자, 석유회사의 사장을 맡고 있으며 저명한 중동 석유역사 학자인 스테판 헴스리 롱리그(Stephen Hemsley Logrigg)가 대표로 나섰으나 회사는 낙찰에 실패했다. 그 원인은 사우디 왕(Ibn Saud)이 원하는 금 대신에 루피 화폐로 입찰 금액을 썼기 때문이다. 소칼은 조광권을 획득해 1938년 담맘에서 석유 탐사에 돌입했다. 그 후부터 IPC는 카타르석유광구(1939년 석유발견), 아부다비(1959년 석유발견), 오만과 예멘에 노력을 집중했다. IPC 사람들은 당시로 볼 때 남부 아라비아에서 일련의 획기적인 탐사활동을 수행했다.

▲ IPC 소유 고속 비행기.

IPC가 비록 바레인과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광구 취득에 실패했으나 다른 회사가 중동의 그 외 지역 광구에 참여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광구 획득의 주요 경쟁자는 영국석유개발회사(British Oil Development Co. Ltd., BOD)와 소칼(SOCAL: ARAMCO의 전신)이었다. BOD가 이라크 북부 광구에 관심을 갖게 되자 결국 IPC는 이 회사를 사 들였다. 노력이 아주 성공적이어서 1944년 말에 IPC는 120여만㎢ 광구면적을 독점 운영하게 됐다.

그 면적이 택사스, 오크라호마, 알칸사스와 루이지아나 주를 합한 면적에 달했다. IPC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터키와 쿠웨이트, 사우디 아라비아의 중립지대 개발권을 허가 받으려고 시도했다.

IPC는 석유 이외에도 요르단의 탄산칼리움광, 시리아의 아스팔트회사, 예멘의 소금광산 등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구체적인 투자에 이르지는 못했다. IPC는 광구까지의 인력과 장비를 운송하기 위해 항공수송회사, 이라크석유수송회사, 포르쉐수송회사 등을 설립했다.

▲ 1948~1958년까지 IPC 회장을 역임한 죤 커닝햄경(좌), 1958년 암살된 파이잘 2세 이라크왕(우).

IPC와 정부관계


하시미테 군주국시절(1932~1958) IPC와 이라크 정부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시미테는 영국에 의해 세워진 극도의 친 서방주의 정권으로 긴장상태는 미미했다. 그들은 영국군대에 의존하고, 바그다드조약에 따라 영국에 충성을 다했다.

하시미테 정권의 주요 쟁점은 석유 생산이 증가되고, 이라크인의 석유생산 관여와 로열티를 많이 받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52년 이라크정부에게 관대한 조건에 관해 협상을 했다. 이 조건은 1950년 아람코와 사우디 계약 조건보다 유리했다. 이 협상은 보다 우호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IPC와 하시미테정부를 전복시키고 1958년에 세워진 혁명정부간의 협상에서는 우호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양 기관의 관계는 두 가지 요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로 큰 요인은 석유는 이라크 경제에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IPC는 정부에게 수익을 안겨주기 때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이라크 혁명정부가 이라크 석유 산업을 인수 받아 운영 할 수 있는 기술과 경영 능력이 없다는데 있었다.

카심시대

▲ 카심 이라크공화국 첫 수상.(1958.7~1963.2)
1950년대 초 이라크 민족주의 세력은 크게 성장했다. 이들은 석유생산이 외국인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1958년 민족주의 성향의 카심 장군이 이라크 군주국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권력을 잡았다. 그는 이라크 총리로서 몰락해 죽을 때까지 5년간 이라크를 통치했다.

그는 쿠데타 전 IPC는 이라크 국민을 위해서보다 서방국가를 위해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라크 정부와의 쟁점으로 이용했다. 집권을 하자 그는 IPC에 대해 몇가지 매우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IPC와 정부간의 통화정책과 IPC에 독점을 승인해 준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나 당시 경제여건 상 카심의 IPC 국유화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란의 모사데크가 석유산업을 국유화 하려 했으나 서방국가들이 거부했던 전례가 있어 이와 같은 전처를 밟을 까봐 우려했다. 카심이 역량만 갖췄다면 국유화의 길로 나아갔을 것이지만, 이라크는 기술과 경영능력의 부족으로 IPC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다. 우선 카심은 정부 운영과 군대를 충족시킬 수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카심은 바스라항의 수송 운임율의 1200% 인상을 포함해 여러 전략을 썼다. IPC는 이에 맞서 바스라항에서 선적되는 원유 생산을 중단했다. 이 양자 간의 대치 관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 질지는 그 시점에서 전혀 예측이 불가능했다.

카심이 인상율을 99.5%로 조정함으로써 양자 대립은 끝났다. 1952년 협상과 이번 협상의 한 가지 큰 차이점은 이라크 정부의 협상 태도였다. 1952년에는 IPC 의견을 대부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카심은 여러 가지 입장에서 협상을 주도하려고 했다. 이는 그리 놀란 일도 아니다. 카심은 당시 타오르는 아랍민족주의 횃불과 대부분의 이라크 국민이 서방국가에게 착취당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IPC, 1972년 국유화

1960년대를 통틀어 이라크 정부는 IPC를 비판하고 반 서방 선전의 중요 이슈로 활용했다. 1969년 소비에트-이라크 협약은 이라크 정부를 대담하게 만들었다. 이라크 정부는 1970년 IPC 자산의 20%와 더 많은 통제권 등을 포함한 요청 목록을 만들었다. 이때 IPC는 이라크 정부요청을 중대 사안으로 받아들여 큰 양보 안을 만들었다. 그들은 석유생산을 상당히 증대하고, 일부 지역에서 유가를 인상하며, 또한 로열티를 선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라크 정부는 이는 충분치 않다고 보고 1970년 11월에 이라크의 운영 참여 확대와 보다 많은 이익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라크 요구조건 협상에 IPC가 선뜻 나서지 않자 이라크 정부는 1972년 5월에 비슷한 조건을 IPC에 최후통첩을 했다. IPC는 절충안을 제안 했으나 이라크의 바트당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1972년 6월 1일 IPC를 국유화 시켜버렸다.

당시 키르쿡 유전은 아직도 북이라크 원유 생산의 주축이었다. 키르국 유전의 잔여 가채 매자양은 100억 배럴이나 됐다. 단지 잠부르, 바이 핫산, 카바즈 등만이 그 외 생산 유전에 불과 했다. 이라크 북부 유전지대는 이란과의 전쟁 때 비교적 온전히 보전됐다. 그러나 걸프전 때 남부와 중앙 이라크 유전 시설 60%이상이 파괴 됐다. 1991년 쿠르드와 이라크 군대가 교전 중에는 임시 태업이 발생했다. 1966년 북부와 중앙 이라크 유전의 생산 능력은 일산 70~100만 이었고, 걸프전 전에는 120만 배럴이었다.

IPC 계열사 중 ADPC만 명백 유지

IPC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나 서류상 이름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계열사 중 하나인 아브다비 석유회사(Abu Dahbi Petroleum Company, ADPC)-종전의 석유개발회사(트루키알 코스트)-가 오늘 날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다. ADPC는 아직도 아브다비 육상광구의 지분 40%를 보유하고 있으며 나머지 60%는 아브다비국영석유, ADNOC이 소유해 정부를 대신한 대주주다. 회사운영은 지방회사인 ADCO(아브다비 육상광구 운영회사)가 맡고 있으며, ADNOC과 ADPC의 주주-BP, Royal Duthc Shell, Exxon Mobil, Total S.A, Partex-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어 IPC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까지 존재 사유는 아브다비 육상광구의 조광권이 2014년 1월에 종료되기 때문이다.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2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에너지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