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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석유산업의 흐름(4)

이라크 석유산업의 흐름(4)

  • 기자명 계층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2.10.0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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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성과의 불편한 관계(1979.7~2003.4)

사담 후세인이 집권하기 3년 전인 1976년이 바로 이라크 국영석유회사(INOC)가 국영회사로서 그 종말이 시작된 첫 해였다. 그러나 실제로 완전히 해체되기까지는 그 후로 10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야만 했다. 이라크에서 오일 메이저의 후계자는 일부 자신들의 성공에 따른 희생이며, 또한 정치적 시대 변화에 뒤따르는 희생이었다.

1976년에 제정된 석유성 조직 법안 101호는 1964년과 1967년에 제정된 유사법에 비해 현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주요 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 101호는 다가올 큰 변화에 대한 조기 경보기였다. 이 법을 강력히 추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혁명위원회 의장(Ahmad Hasan al-Bakr)은 법령 부칙에 서술해 밝히고 있다. 바트당 지역의회 정치보고서도 새로운 정부 조직에 걸맞게 변화를 촉구하는 정치보고서를 내놨다. 이 새로운 법이 시사하는 바는 석유부문과 여타 경제부문과의 연계성을 높이고, 중앙정부의 계획과 석유부문 계획을 통합하는 데 있다.

이어지는 법령 강화로 석유성 장관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장관을 석유부문의 최고 경영자로 만들었고 INOC는 한때 번성하면서 누리던 경영의 독립성은 점차 쇠퇴해갔다.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법은 1979년에 제정된 156호로 석유 가스부문의 모든 수입을 재무성에 귀속시켜 INOC의 재정적 독립성은 종말을 고했다. INOC 운영비는 정부의 연간 예산편성에 포함돼 연간 예산으로 배정받아 집행됐다.

1983년 혁명위원회 의장인 사담 후세인은 법 101호의 개정을 위한 법령을 공표했다. 개정안은 석유성 장관이 INOC 이사회 회장임을 재확인하고, 석유성 차관의 위치를 기획담당에서 상류부문 책임자로 변경시키고, INOC 회장으로 승격시키는 내용이다. 기획과 연구 두 부서로 나눠졌던 조직을 석유성 내부의 한 부서로 통합 신설해 INOC 기획부서를 흡수했다. 뿐만 아니라 INOC의 권한과 역할은 계속 축소됐다. 행정부서도 폐지돼 석유성 내에 유사 조직이 만들어졌다.

INOC는 자신의 영역이 정치적 이유에서 잠식당했지만 1970년대 국유화 물결 속에 가속이 붙어 계속해서 큰 성공을 거뒀다. 국유화로 국제석유회사가 철수함에 따라 몇 가지 사업전선에서 공백을 메우려고 탐사, 생산 시설 건설 및 수출 시설 구축, 상·하류부문의 요원 훈련 등의 작업을 실시했다. 첫 번째 5개년 계획기간(1976~1980)에는 황금기를 이룩했다. 이 기간 중 특히 1979년에는 역사상 석유 생산 최고 기록인 일산 380만 배럴을 달성했으며, 이 기록은 그 후에도 갱신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에 휘둘리는 석유산업(1987-2009)

1987년 4월 법령 267호가 공포될 무렵의 국영회사는 1964년 그것과 비교하면 속 빈 강정에 불과 했다. 이 국영회사는 시추와 탐사부서, 행정과 재무부서 그리고 3개의 상류부문 즉 남, 북 및 중앙 부서로 조직됐으나 권한은 거의 없었다.

1987년 법령에 따라 북부석유회사, 남부석유회사 및 탐사회사가 설립됐으며 시추부서와 석유부서를 석유성 본부에 두었다. 이 법령은 NIOC 이사회가 석유성 장관으로 대체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종전에 NIOC 운영에 적용됐던 모든 법령이 그대로 새로 설립된 회사에 적용됐으며, 장관도 권한을 그대로 갖게 됐다. 그 결과 상류부문 회사들은 권한이 없는 석유성 산하의 절름발이 자회사로 전락했다. 즉 본부결정에 따라 단순히 집행만을 하는 행동 부대에 불과했다.

1987년 4월 또 다른 법령인 272호는 기존의 국영회사 판매부서를 대체해 석유성에 원유판매 부서를 신설했다. 이 부서는 장관을 수장으로 하는 위원회 감독하에 있었으며, 고문 직위를 가진 전무이사가 운영을 했다. 위원회 구성은 대통령 궁 대표와 중앙은행장이 포함됐다.

언급조차 할 필요도 없이 1980년대부터 시작해 계속된 바, 석유산업은 중차대한 국가경제 성장 발전의 수단방법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금 줄로 쓰였다.

한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전쟁에 휩쓸리고, 유엔의 경제 제재로 인해 석유산업은 위축될 대로 위축된 상태로 정체됐다. 이 시기의 주역은 석유성 장관으로 석유분야의 정책수립, 경영 등 모든 권한을 갖고 상·하류부문을 관장했다. 그 결과 장관이 교체되면 사업의 우선 순위가 언제나 뒤바뀌었다.

활기찼던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을 지나서 이라크의 석유산업은 사업확장, 신규사업추진, 국제석유회사와의 계약 체결 등 모든 것이 정치적 우선순위에 따라 결정됐고 경영은 예산편성, 지출, 의사결정 등도 정치적 계산에 따라 좌우됐다. 그리고 정치적 우선 순위에 입각해 외국석유회사를 선별적, 개별적으로 계약 형태도 여러 가지가 존재했다.

최우선 순위는 항상 가능한 생산량을 최대로 유지해 수입을 극대화하는 쪽에 뒀으며, 특히 식량을 위한 석유 판매 허용 후 더욱 두드러졌다. 이 시기에 INOC는 종말을 고했으나 다른 중동의 국영 석유회사는 합병과 성장으로 국가의 유력집단이 돼 국제석유시장에서 주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한계인 상·하류부문을 넘어서 사우디 아람코, 쿠웨이트 석유회사, 아부다비 국영석유와 같은 국제적인 석유회사로 성장했다.

부시의 무력 침공 후유증

최근 이라크 석유분야와 그 기구에 관한 구조 조정은 1964년 및 1967년 때와 같이 정치적인 세태, 즉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정해졌듯이 현재 우세한 정치체제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 국가가 정치적 과도기를 거쳐야 한다면 현 체제에서 만들어진 모든 실체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 석유산업의 주역인 석유성과 INOC 최종적인 형태는 결국 이라크 미래의 정치 형태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오늘 날의 이라크 정치 형태는 영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직도 확정됐다고 할 수 없는 실정이다.

2003년 낡은 정치체제 붕괴로 인한 후유증, 즉 세력간의 팽팽한 균형을 감안하면 이라크는 연방국가 체제가 돼야 한다. 중앙으로부터 지방으로의 권력이양은 전에 없던 일이며 그 결과 새로운 형태의 갈등이 일어나고, 석유분야에서도 각각 다른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됐다.

이라크는 정치적 발전과정에서 지난 6년간 이렇다 할 중앙정부가 수립되지 않아서 석유분야 구조 조정을 위한 새 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강력한 지방정부 또한 수립되지 않아 권력 이양의 강력한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했다. 쿠르드 북부 지방의 경우를 비춰 볼 때 지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현실성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석유 정책의 독립성에 있어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말았다.

권력 투쟁에 가담하고 있는 서로 다른 이해 집단은 종족, 종교, 지역 등을 내세워 제각각 정치세력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라크 석유산업 개편에 관한 법안 제정에 있어서도 언제나 이해관계자들 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석유가스법, 석유성개편법, INOC 및 석유수입 배분법 등 제안된 4개의 법안이 과거 석유관련 모든 법을 대체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법안들을 토대로 하여 향후 이라크가 지향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석유산업을 운영하고 조정할 것이다. 법령의 제정은 현재의 이라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이라크를 만들려는 도전인 것이다.

이 법은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과거 힘 있던 체재로 되돌릴 수는 없다. 1960년대 및 1970년대 서방 석유회사를 적으로 간주하던 민족주의를 오늘날 지역적 국제 사정에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혁명위원회의 법령에 선전을 일삼던 1980~1990년대에도 맞출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날 전후 사정을 감안해 이라크 석유산업과 새로운 INOC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새로운 석유민족주의 감각을 가지고 국제석유회사와 협력해 이라크의 국익 성취를 기해야 한다.

2004년 INOC 재건을 위해 소극적인 시도가 있었다. 당시 과도정부 각료회의에서 아야드 알라위(Ayad Allawi) 수상은 석유정책 초안을 수립해 최고회의에 상정했다. 이 제안서에 따르면, INOC는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석유성 장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 독자적인 법인체재 설립을 추진한다. 궁극적으로는 주식을 팔아 부분적으로 민영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알라위 수상은 우선 정부 비상자금을 자본금으로 납입하고 추후 INOC가 상업차관을 일으키거나 생산증대로 인한 수입금 증대, 합자회사 자금 등 자체적으로 재원을 마련해 충당토록 하는 방안이었다. 이 제안이 공론화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다음해 알라위 임시 각료회의가 새로운 정부로 대체되면서 이 안은 자취를 감췄다.

INOC 재건을 위한 몸부림

그 후 INOC 재설립을 위한 입법 초안이 2009년 8월 장관 회의에서 승인됐다. 그러나 법제화까지는 아직 의회의 심의가 남아있다. 통과가 되면 1967년 누렸던 강력한 국영석유회사가 재탄생하게 된다. 다만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세태를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법 초안에 의하면 새로운 INOC는 석유·가스·지하자원을 궁극적으로 탐사·개발·생산 등을 통해 현실화시킬 수 있는 현대적이면서도, 기술·경제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국영회사로 거듭나도록 했다. 이 국영회사는 석유성으로부터 독립돼야 하며, 그의 부속기관이나 방계회사도 아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내각 직속으로, 이사회의장을 장관급으로 격상시켜 최고경영자를 겸하도록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석유성 장관이 전문가임을 내세워 국영회사의 의장으로 정치적 역할을 배제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문제는 석유성 장관의 과거의 유산과 업무영역 때문에 상당한 마찰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민한 문제로 일부 국영회사는 석유성 산하의 이라크 시추회사, 이라크 탐사회사 등의 형태로 남게 될 수도 있다.

2009년에 작성된 초안은 과거에 비춰 강력한 국영석유회사 설립을 시도하고 있으나 한계성, 내적인 제한, 누락 등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정치 체제와 똑같이 그 속에서 배태된 이 법안도 여러 가지 타협과 절충을 거쳐서 나왔다. 팽팽한 정치세력의 균형을 볼 때 의회의 지지를 얻으려면 더 큰 타협이 필요했다. 아니면 이제까지 지지부진하던 석유가스 법과 같이 INOC 법안도 늦춰지게 될 것이었다.

- INOC와 그 산하에 있는 정유, 개발생산, 제품유통 등의 회사 모두가 석유성에 예속되고, 석유성 장관이 INOC 이사회 의장이 되는 반면 기존의 INOC 이사회 의장은 제2인자인 부의장이 된다.
- 이사회 의장과 부의장 외 기획 및 계열사 담당인 2명의 차관이 임원에 포함되고, 장관이 5명의 전문가를 이사로 임명한다.
- INOC에서 결의된 모든 사항은 장관의 승인을 득해야 효력이 발생하며, 장관이 찬성한 모든 안건은 유리하게 작용해 보증수표와 같이 집행된다.
- 비록 계속해서 INOC 관계회사로 존속하더라도 북부 석유 가스 기관(키르쿡 중심으로 추후 North Oil Company로 발전, 남부석유가스 기관 바스라를 중심으로 추후 South Oil Company로 발전)과 탐사시추기관, 원유 및 제품판매 수송(SOMO; State Oil Marketing Organization 로 발전) 기관은 이사회 의장인 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
- 석유성 조직법에 따라 석유성은 석유 탐사, 시추, 생산, 정유, 가스처리, 수송 및 판매, 석유 관련 건설, 석유 사업용 수입 등 석유 분야전반에 걸친 경영을 하게 됐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2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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