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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C의 전략적 발걸음(2)

OPEC의 전략적 발걸음(2)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0.08.1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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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산유국(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이란 등)은 1960년 OPEC을 결성하여 적정한 유가수준을 유지함으로써 자국의 경제성장과 세계석유수요에 안정적 공급을 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OPEC은 사무총장, 본부 등이 건재하지만 유가를 안정시키고, 세계석유시장을 조정하기에는 비 효율적인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70년대에서 80년대 초 까지 세계석유시장을 선도하고 가격을 책정하는 유일한 기구였으나, 오늘의 OPEC은 고작해야 자국의 재정난을 피하려고 시장에 대응할 뿐이다.

오늘의 문제는 석유시장변동에 대한 대처 방안과 가격추이에 영향을 주는 행동이 다수의 회원국들이 참여한 가운데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장은 본회의가 아닌 몇 몇의 주요생산국인 사우디 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쿠웨이트, 이란 등과 비 OPEC 국가인 멕시코 노르웨이 등의 주요생산 국가간의 회의에서 논의되고 결정된 정책에 의하여 좌우된다. 본회의에서는 이미 결정된 사안을 비준하는 절차에 불과한 것이다. OPEC은 1970년대이래 반복되는 정책의 잘못으로 그 가격 카르텔의 기능은 사실상 상실한 것이다.

OPEC의 자업자득
한때 세계경제를 뒤 흔들던 OPEC이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게 된 것은 역사적인 사건 때문이 아니라 OPEC 스스로가 알고 있는 사실로서 자신들이 저지른 자업자득의 결과이다.

1973년 가을 OPEC 회원국들이 유가 결정권한을 국제석유회사로부터 인수하고 회사가 보유한 석유광구를 노골적으로 국유화 하기로 결정했을 때 OPEC 회원국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갑자기 뒤바뀐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국제석유회사들이 전적으로 운영하고 있어 발언권이 전혀 없는 파트너로서 단순히 세금과 로열티만을 회사로부터 걷어 드리는 것이 전부였으나 이제부터 OPEC 회원국의 정부는 준비가 안되었거나 미숙한 상태하에서 엄청난 재정적 정치적 파워를 행사하게 됐다. 1970년대 이러한 OPEC의 과감한 움직임은 경제사회 발전에 필요한 수입의 원천인 석유를 정치적인 상품으로 변형시켜 놓았다.

따라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익을 위하여 가격의 안정을 유지한다’라는 당초 설립 목적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 결과 1973년에 $3/바랠 이었던 유가는 OPEC이 계속적으로 인상 시켜 정부 공시 유가는 1981년 정월에 $36에 이르렀다.

OPEC의 유가 결정은 성격상 정치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다음의 정치적인 사건들과 유가상승을 연결해 보면 그리 놀란 만한 일도 아니다.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산물인 아랍의 석유금수조치,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혁명, 1980년의 이란-이라크 전쟁, 1990년의 걸프전 등과 유가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석유시장에서 일시적으로 석유부족 현상을 일으켜 유가는 급등했으며 OPEC은 이 높은 가격을 기준으로 하여 정부 공시 유가를 책정했다. 이 정부공시 유가제도는 책정된 가격 이하로는 석유를 팔 수 없게 했다. 정치적인 사건이 종식되어 더 이상 석유시장에서 부족사태가 일어 나지 않아도 OPEC은 유가를 조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상 사태로 인한 일시적인 고유가를 최저 정부공시가로 계속 유지시켰다. 그리고 석유회사와 소비자는 보다 싼 석유를 찾을 때 까지는 고스란히 고유가를 지불 할 수 밖에 없었다.

OPEC의 과격한 유가정책은 정치 세력과 정치적인 고려에 의한 강요된 산물이다. 소위 1973년10월 아랍석유금수조치는 세계 석유정치계 크나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 같은 금수조치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지 못하고 처음으로 상품을 정치무기화 한 것은 스스로 패배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립목적의 배반은 아랍석유를 줄이려는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 아랍석유금수조치는 이스라엘과 6일 전쟁 후 아랍세계가 사우디 아라비아에 거센 압력을 가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970년대의 OPEC은 매장량의 1/3을 가진 사우디 아라비아 보다 1.2%를 가진 알제리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사실상 주도권을 가지고 움직였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정치적으로 미약했으며, 알제리는 제 3세계의 정치적 리더로서 제한된 석유자원으로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고유가 정책을 획책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5년 3월 알제리에서 개최된 OPEC 정상 회의에서 알제리는 OPEC유가 정책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중대선언”을 했는바 석유산업의 현실과 카르텔의 경제 원리와도 모순된 것이었다. 이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유가 결정원칙은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어 그 후 계속해서 OPEC의 발목을 잡았다.

그 결함 중에 하나는 유가결정의 이론체계에 석유는 고갈성 자원임을 크게 부각시킨 점이다. 이는 석유공급이 감소 함에 따라 미래의 가치는 증가 할 것임으로 제한적 자원의 고갈에 따른 보상차원에서 유가는 점진적으로 올려야 한다는 근거를 정당화 했다. 그러나 과연 중동의 석유 고갈이 발등의 불이었던가?

몇 가지 수치를 보면 이 중동지역에서 석유자원이 줄어 들고 있다는 오류를 범했다. 이 지역은 세계 석유 가채매장량의 2/3를 보유하고 있으며 석유생산 가능 년도는 100년(현재 확인 매장량 /생산량)인데 비하여 북해유전이 7년이고 미국이 10여 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현재 기술로는 원시 매장량(oil in place) 30% 밖에는 회수를 못하는데 채유기술의 발전으로 회수율이 점차 높아 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라크에는 미 탐사지역과 미개발 유전이 상당히 많이 있어 상당한 량의 석유공급을 기대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대한 석유보유량을 가지 있는데 절박한 자원의 고갈을 심각하게 고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대선언 중 또 다른 잘못은 유가 책정의 기준으로 대체에너지의 생산비용을 감안한 것 인바 당시 석탄 액화 비용은 $40/배럴이었다. 또 이 선언은 당시 아라비안 경질유가 $12/배럴이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 됐다고 했으나 현재 달러로 환산하면 $37/배럴 해당한다.

이런 유가책정 기준은 비 경제적이며, 또한 석유시장에서 전혀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OPEC 내부에서 복음의 진리로 통했고,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분위기 속에서 고유가에 관한 어떠한 논쟁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결과적으로 오랫동안 회원국들이 직면한 주요 문제를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토의 된 적이 없었다. 이란의 사아 정부는 정치와 군사로 중동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탐욕스럽게 오일 머니를 추구해 보다 높은 고 유가를 강요했다. 실제로 고유가에 반대하는 OPEC내의 온건파는 고유가 공포의 분위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1970년대 OPEC의 전략적 기조가 오늘날 OPEC을 마비시키는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OPEC의 근시안적인 전략에 대한 세계의 대응
고유가 충격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OPEC 석유수요는 강세였으며 그 이유는 대체방안을 찾는데 리드타임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계속된 가격 충격 속에서 OPEC 국가는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 OPEC 석유 수출의 가치는 1971년에 230억불에서 1980년에 2850어불로 치솟았다.

세계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든 것은 그렇다 치고, 소위 석유 달러(Petrodollar)의 초과다 수입은 OPEC 회원 국들간에 비 합리적이고 무절제한 소비 지출형태를 창출해 냈다. 국가가 교육, 건강 등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비용을 대주고, 주요식품도 보조해주고 나아가 고용까지 보장하는 등 막대한 지출증대를 초래했다. 고유가로 인한 횡재를 경제 사회발전에 투자하여 석유 수입의존도를 경감 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석유 수입 의존도를 더욱 높여 갔다.

이와 같은 OPEC의 계산착오와 정책의 오류는 얼마 안가 역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고유가의 충격은 유류 소비증가율을 크게 억제시켰다. 특히 산업 국가에서 그러했으며, 그리고 비 OPEC 유류의 공급증가는 직접적으로 OPEC과 경쟁을 하게 됐다. 대체 에너지로의 변환, 에너지 절약의 보편화, 연료의 효율 제고 등으로 OECD의 석유소비는 극적인 감소를 가져왔다. 그래도 석유 수요는 증대했지만 전보다 아주 완만했다. 그 결과 1977년 서유럽의 GDP는 누적적으로 47% 증가 했지만 석유소비는 20년의 그것과 동일했다. 그리고 비록 미국과 일본의 석유소비 감소율은 크지 않았지만 양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것이었다.

비 OPEC 석유공급의 증가는 고유가체계로 인해 경제성이 높아져 한계유전의 개발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즉 OPEC의 정책과 고 유가에 힘입어 높은 생산비가 소요되는 지역으로 알려졌던 OPEC 이외 지역에 방대한 투자가 이루어 졌다. 유가 충격이 있기 전에 발견된 알래스카의 푸르도베이, 북해의 브랜트 등의 몇몇 주요유전을 제외 하더라도 OPEC이외 지역에서 석유탐사 투자가 가속화 됐고, 여기서 생산 되는 새 석유가 세계시장에서 OPEC 석유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현실은 OPEC의 세계석유시장 점유율을 대폭 감소시켜 더 이상 유가 결정력을 가진 진정한 의미의 카르텔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됐다.

OPEC 이외 지역에 투자가 확대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유전의 국유화이다. 그 동안 국제석유회사가 보유한 유전 운영권을 국유화 했기 때문에 석유회사는 이곳에서 더 이상 투자를 할 수 없게 되어 OPEC 이외 지역을 택하게 됐으며, 1980년부터 1995년까지 투자액은 3500억불로 추정된다.

둘째 고유가 정책이다. 고유가체계의 효과는 높은 생산원가의 유전의 경제성을 현저하게 개선 시켰다. 높은 국제유가로 인하여 높은 생산 원가를 상쇄하고도 충분한 이윤이 시현됐고, 정부의 석유세수입도 아울러 증가했다. 1970년대 와 1980년대 간에 북해유전의 세금포함 생산 원가는 $20/배럴 이었으며, 일반적인 국제 시세는 $28/배럴 인바 충분한 자금의 여력을 갖게 되어 새로운 유전에 투자가 활발해졌다.

셋째 석유산업의 대대적인 기술혁명이다. 기술 혁명은 유전의 탐사비와 생산비를 대폭 절감 할 수 있어 새 유전의 개발을 촉진시켰다. 지난 10년간 40%이상의 비용절감을 가능케 하여 계속해서 신규유전의 투자를 감행했으며, 나아가서 유가가 $18/배럴로 내려도 가능했다.

지난 20년간 이러한 투자로 인한 유전 개발은 일산 1800만 배럴의 생산능력을 갖추어 OPEC 석유에 손실을 입혔다. 1998년 OPEC 전체의 생산량은 일산 약 2700만 배럴로서 1978년 최고치 보다 400만 배럴이나 감소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같은 기간에 세계석유수요는 구 소련을 빼고 1700만 배럴 이상 증가했다. OPEC의 근시안적인 정책은 이상한 석유경제의 형태를 남겼다.

즉 고생산원가의 석유가 저생산원가의 석유보다 우선한다는 것인데 이는 고유가가 새로운 유전 개발을 유도했고, 또 OPEC은 인위적으로 고유가를 유지하고자 최종 공급자 역할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1983년부터 OPEC은 공식적으로 생산 쿼터제도를 도입 실시하여 자신의 총 생산량은 세계 석유수요에서 비 OPEC 석유공급량을 감한 나머지 수량으로 결정해 회원국간에 쿼터를 결정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 제도는 회원국간에 상처만 남기게 됐다.  다음 달에는 OPEC의 종말을 분석하고 그 대안은 무엇인가를 다루면서 OPEC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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