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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II]

우리는 이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II]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1.04.0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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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문화의 황금기(820~1220)

페르시아에 왕조가 최초로 수립된 이래 14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었으며, 두 번의 큰 외침을 겪었으나 이란은 그 정체성을 견지하며 외세를 몰아내거나 필요 시 함께 융합해 페르시아 문화와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서기 800년에 시작해 그 후 400여 년간이나 페르시아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문화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로 내릴 수 있겠으나, 유네스코에 따르면 “문화는 한 사회 또는 사회적 집단에서 나타나는 예술, 문화, 생활양식, 가치관, 전통, 신념 등의 독특한 정신적, 물질적, 지적 특징”이라고 정의된다. 이 황금기의 문화는 어떤 것이며 오늘날 우리 인류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페르시아에 대한 아랍의 지배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페르시아 각 지방에서 군주들이 봉기해 크고 작은 5개의 왕조가 성쇠를 거듭하다가(821~1055) 3개의 터키 왕조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가장 귀에 익은 왕조가 터키 셀죽이다. 이 왕조는 무슬림국(1038~1153)으로 제1십자군과 싸운 나라이기도 하다.

5개의 이란 왕조 중 사마니드(Samanids, 873~999)는 최초로 법정에서 페르시아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했다. 이시기에 현대 페르시아어가 탄생했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꽃을 피우게 됐다. 페르시아는 또 한번 예술, 문학과 과학의 세계중심이 됐다.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주요 인물들이 등장해 이슬람세계에서 성과를 거둬 페르시아는 이슬람 문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1. 840년부터 940년까지 (100년간)

페르시아학자인 시보바(Sibovayh)가 아랍어의 기초를 확립했고, 최초로 아랍어 사전을 편찬했다. 뛰어난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와라즈미(Khwarazmi)는 정확한 천문표(天文表)를 작성하고, 최초의 대수인 ‘통합과 방정식’이라는 책을 썼다. 대수(algebra)라는 말은 그가 쓴 책에서 유래됐으며, 알고리즘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또 ‘영(零)’의 개념을 세우는데 기여했고, 십진법체계를 완성시켰다. 그의 수학적인 두뇌와 많은 이슬람학자의 지혜를 결집해 아라비아숫자를 만들어 냈다. 이 숫자는 얼마 후 개정돼 서구에서 사용하던 로마숫자를 대체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다.

페르시아 통치권자는 아랍에 공공연하게 대항해 아랍의 통치에서 벗어났으며, 페르시아어를 촉진시켰다. 당시 물리학, 화학, 철학 등 성공적인 학자 중에 한 명인 라지(Razi)는 알코올의 의료사용법을 발명했고, 광범위한 저술을 했으며 특히 의학서를 많이 썼다. 그 중 천연두 치료법은 많은 유럽국가의 언어로도 번역됐다.

페르시아 문학의 시조인 루다키(Rudaki)는 페르시아어를 정화시켜 구체화함으로써, 서정적이며 시적인 언어로 승화시켰다. 그의 공헌이 특별히 주목 받게 된 것은 시가 페르시아의 문화와 정체성의 지주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2. 940년부터 1055년까지 (115년간)

▲ 그림1> 테헤란 퍼두시광장에 있는 퍼도시 기념상
이란의 국민시인이며 위대한 영웅으로 추대받는 페르도시(Ferdowsi)는 이란의 국가적인 대 서사시 샤나메 (Shahnameh), 제왕의 서(書)를 1010년에 완성시켰다. 이 서사시는 30년이나 걸려 쓴 대작으로, 5만여 개에 달하는 이행시(二行詩)이다.

이슬람의 침공 이전의 이야기를 내세워 이란의 순수성을 강조하려고 로스탐(Rostam)이라는 영웅일생을 그렸다. 그가 인류를 위해 괴물과 금수를 멸살시키며, 5개의 이란 왕조를 섬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페르도시는 독실한 이슬람교도였지만 아랍의 영향을 철저히 배척한 페르시아 정체성의 진정한 옹호자였다. (그림1 참조)

이븐 시나(Ibn Sina)는 이슬람 문명권에서 저명한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한 사람으로 200여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이중 유명한 것은 당시 세상에 알려진 모든 처방을 요약 집대성한 ‘The Canon of Medicine(약방문집)’이다. 이 책은 라틴어, 중국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돼 17세기까지 여러 의약품 서적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도 예일대학이나 UCLA에서 고대의학의 하나로 가르치고 있다. 그는 또한 명성 있는 철학자로서 진리를 찾아내는 한 수단으로써 논리와 이성을 강조했다.

이란의 북 중부지방에서 일어난 뷰이왕국(The Buyids Dynasty)은 아랍군대를 무찌르고 바그다드를 점령해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지역을 통치했다.(10~11세기) 단지 칼리프 (Caliph: 이슬람국가지도자 명칭)라는 명칭은 유지시키고 권한은 오직 종교의 최고 지도자로만 행세하게 했다. 페르시아인에 의한 뷰이왕국은 이슬람세계의 동쪽을 한세기 동안 지배했다.

3. 1092년부터 1220년까지 (128년간)

니잠 알물크는 셀죽왕국의 수상이며, 왕은 그의 도움으로 시리아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사실상의 이슬람세계의 동부 전체를 지배했다. 그는 ‘정부와 정치’라는 책을 저술했다. 재판의 절차규정, 체계적인 의사결정과 임의적인 법정 명령의 제한을 주장했으며 또 셀죽 법령에 따라 주요 도시에 니잠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들은 이슬람세계에서 주요 교육기관이 됐다. 그는 가잘리와 카이암의 후원자이기도 하다.

가자리(Ghazali)는 당대의 저명한 무스림 법률가이자 신학자였다. 그는 실존(實存)을 단순한 이성적 논리적인 것에 한해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며, 더욱 신비스럽고 영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림2> 니샤프어의 카이암 조각상

그는 이븐 시나의 이성주의(理性主義)에 반대하는 견해의 대표자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후일 이슬람사상에 대한 이븐 시나의 영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는 수피교의 중요한 지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수피교도는 인생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명상을 통해 하나님과 보다 가까운 친교를 맺어야 하며, 자신의 내적인 면을 숙고하고, 세속적인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오말 카이암(Omar Khayyam)은 위대한 수학자, 시인 그리고 천문학자였다. 그는 수학적인 계산으로 페르시아의 달력을 고쳐서 새로 만들었다. 이 달력은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것이었으며 현재도 사용중이다.

그는 이스파한에 천문관측소를 건립하는데 도왔으며, 그가 쓴 루바이얏 4행시는 아주 유명한 동양의 시가 됐다. 인간 존재에 관한 크나큰 수수께기를 다루면서, 그의 시는 사랑과 생명의 신성한 선물을 찬미한다.

루바이앗은 19세기에 영국의 시인 핏제랄드가 번역해 동양의 가장 아름다운 시로 유럽에 알려졌다. 핏제랄드는 이 시를 번역하고 일약 영국의 계관시인이 됐다. 그 후 수많은 언어로 번역돼 수백 만부가 팔렸다. 필자도 대학교 1학년 영어시간에 이 4행시의 일부를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춥던 겨울도 지나 이제 봄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니 그의 시 한 절을 소개하련다.(그림2 참조)

Come, fill the Cup, and in the fire of Spring
Your Winter-garment of Repentance fling:
The Bird of Time has but a little way
To flutter---and the Bird is on the Wing.

이리 와서 잔을 채우게, 그리고 봄의 열기 속에서
후회로 얼룩진 자네 겨울 옷일랑 벗어 던지게나,
시간이라는 새는 갈 길이 그리 멀지 않은데,
--- 이 새는 지금도 계속 날고 있다네.

몽고 침략 시대(1220~1405)

1. 1220년부터 1292년까지 (72년간)

▲ 그림3> 몽고의 바그다드 공략 1258년
1206년 징기스칸은 몽고를 통일하고 세계 정복의 길로 나섰다. 1220년 징기스칸과 몽고의 무리들은 미증유의 잔인성을 가지고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이 침략은 결국 인류역사상 가장 처참한 재앙을 초래했다.

페르시아 북동부지역에서 그의 후손들 특히 훌라구 칸은 주요도시를 휩쓸어 버렸다. 도서관과 병원을 파괴하고, 전 주민을 대량 학살해버렸다. 사망자수는 70~130만명으로 추산된다.

징기스칸이 죽자 몽고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나눠졌다. 1258년 몽고가 바그다드를 함락시킴으로써 아바시드 칼리푸 체제가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 일카니드왕국은 페르시아를 지배하는 몽고 제국의 일부로 간주됐다.

1271년 마르코 폴로는 중국여행 길에 페르시아를 거쳐갔다. 자신이 저술한 ‘여행에 관한 책’에, 한때 막강하고 번성했던 그 아름다운 페르시아가 이제 파괴, 살생, 약탈, 죽음, 황폐 등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라고 적고 있다.(그림3 참조)

▲ 그림4> 마스나위(루미의 가르침)

루미(Jalal ad-Din Muhammad Rumi)는 페르시아어의 신비주의 시인의 거목이며, 마트나위(Mathnawi)는 ‘심오한 영혼의 뜻을 기리는 2행시’의 저자로서 수피교를 전례없이 최고의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

그는 페르시아인이지만 아나톨리(지금의 흑해에 접한 터키지역)에서 살았는데 이는 그의 부모가 몽골의 잔인성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와 철학은 이슬람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그림4 참조)

사디(Sa’di)는 아주 중요한 2개의 페르시아 작품을 남겼으니, 부스탄(Bustan: 과수원)과 굴리스탄(Gulistan: 장미정원)이다. 부스탄은 운문형식의 서사시로 모슬렘들이 지켜야 할 덕목으로 정의, 관용, 겸손 등을 읊었고, 굴리스탄은 산문형식의 시로 격언, 충고, 유모 등으로 부조리한 인간존재에 관한 심오한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그의 시는 인도 중앙아시아 멀리는 중국에까지 광범위한 영향권을 가졌다. 그의 시는 또 모든 인간은 국가, 종족, 종교와 관계없이 상호의존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비문을 원했다. “시라즈의 아들 사디의 무덤-사랑의 향기가 새어 나가는 도다. 내가 죽은 지 천 년이 지나서도 사랑의 향내를 한결같이 맡을 수 있기를---”

2. 1295년부터 1405년까지 (110년간)

가잔 칸은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몽고 왕 중 처음으로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다. 그가 개종 후 몽골체제도 그리스, 아랍, 터키 등 침략자들의 선례와 같이 페르시아화 됐다. 가잔 칸의 총리인 라시드(Rashid ad-Din)는 페르시아의 학자로 페르시아 몽고왕국의 하나뿐인 역사책을 썼다.

몽골침략으로 황폐화 된 지 거의 100여 년이 지나서야 이 총리에 의해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번영과 평화를 이룩했다. 당시 광대한 영토를 가진 몽골제국은 중국, 인도, 페르시아와 문물, 사상, 문화 등의 교류가 원활하게 이뤄졌다.

카말(Kamal Al-Din Farsi)은 빛의 굴절과 반사의 이론을 가지고 광학분야를 크게 발전시킨 개척자가 됐다. 하페즈(Hafez)는 저명한 페르시아 서정시인으로 유명작품 디반(Divan)을 남겼다. 그는 수피교도이며, 그의 시는 미적감각(美的感覺), 인간성에 대한 애착, 신에 대한 헌신 등으로 특징 지어진다. 그의 시구는 아직도 이란 각 가정에서 자주 인용되며 학교 교과서에도 자주 나온다.

티물(Timur)은 툴코-몽골 통치자로 대부분의 페르시아와 주변 지역을 점령해 티물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점령지는 다시 한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학성과 대파괴를 면치 못했다. 비록 그는 잔혹하지만 예술은 보호하는 자였다. 그는 수도를 사마르칸(우즈베키스탄에 있음)으로 정하고 페르시아 도처에서 예술가들을 데려왔다. 그가 죽은 후 대제국은 붕괴되고 그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의 여러 곳을 통치하며 거의 한 세기를 지냈다.

사파비드 왕조(Safavid Dynasty) : 1501~1779

이스마일 1세 국왕(Shah Ismail I)은 9세기 동안 외세 또는 분열된 이란 통치권을 하나의 페르시아로 통일했다. 그는 시아파를 국가 종교로 선포하고 그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주변 지역을 사실상 수니파에서 시아파로 바꿔 놓았다. 시아파는 수니파인 오토만과 차별화의 수단이 됐다. 시아파를 국교로 지속시키려고 사파비드왕은 시아파 성직자를 지원했다.(1501~1524)

▲ 그림6> 런던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 소장

아바스 대왕(Shah Abbas the Great)의 치세는 사파비드 왕조의 절정기를 이룩했다. 그는 정예 상비군을 양성해 오토만을 무찔렀다. 1958년 그는 이스파한(Isfahan)을 수도로 정했다. 정열적인 예술 지원자로서 특히 건축에 큰 관심 가지고 있어 세계적으로 이름난 이슬람의 기념비를 세워 이스파한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는 수많은 모스크, 학교, 교량과 바자(bazaar: 중동 식 시장)를 건설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페르시아의 장인과 예술가들은 고급실크, 옷감, 도자기, 철물, 서예, 세밀화(細密畵), 카펫 등을 만드는 아주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1587~1629)(그림6 카펫)

당대 사파비드의 이슬람의 두 적수는 아나톨리 지방의 오토만과 인도의 무갈제국인데 이들은 문학과 예술의 대부분을 페르시아 장인과 시인에 의존했다. 페르시아의 영향은 특히 인도에서 보편화 됐고, 페르시아어가 문화 및 행정용어로 사용됐으며, 이 행태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될 때까지 지속됐다. 그 유명한 타지마할의 기본설계자는 페르시아인 우스타드(Ustad)였다. 그리고 이 건축양식은 페르시아 디자인에 큰 영향을 받았다.

마하모드 칸(Mahmoud Khan)은 사파비드 종속국의 아프간(Afghan: 아프카니스탄)의 족장인데 페르시아를 공격해 이스파한을 무저항으로 점령했다. 그리고 사파비드 왕조는 221년 만에 끝이 났다.(1722)

사파비드 왕조의 한 장교였던 나드르 샤(Nader Shah)는 아프간을 쫓아내고 페르시아를 재통합했다. 그는 아주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오토만, 러시아, 인도 그리고 많은 지방 부족들에게 패배를 안겼다. 인도의 무갈제국을 침략했을 때 나드르 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해광(海光: The Sea of Light, 현재 이란에 있음)과 산광(山光: The Mountain of Light, 영국 왕관의 일부로 장식됨)두 개의 다이아몬드를 획득했다. 나드르는 편집광이 점차 심해졌고, 자신의 경호원에게 피살됐다. 그가 죽은 후 그의 거대한 군대조직은 와해되고 말았다.(1279~1747)

카림 칸 잔드(Karim Khan Zand)는 이란의 중부와 남부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그는 동정심 많은 통치자로 ‘샤(왕)’라는 명칭을 사양하고 스스로 국민을 대표한다고 했다. 그는 라이벌부족 카자(Qajar)와 대대적인 전투를 치렀다. 카림칸 잔드가 1779년에 죽자, 모하메드칸(Aqa Mohammad Khan Qajar)은 잔드왕국을 함락시키고 카자 왕조를 설립했다.

카자 왕조(Qajar Dynasty) : 1795~1921

▲ 그림7> 러시아가 페르시아에게 보낸 ‘터키만챠이 계약’(대포에 주조)
카자왕들은 비록 나라를 재통일했으나 대개가 허약하고 부패로 가득찬 왕들이었다. 이 왕조의 치하에서 경제와 군대는 산업혁명을 일으킨 서구와의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문화 측면에서는 수준 높았으며 특히 그림, 타일과 기념비는 훌륭했다.

유럽 제국주의는 영국과 러시아가 이란의 내정간섭을 하기에 이르렀다. 카자는 두 개의 계약체결(굴리스탄과 툴크만차르 계약)로 러시아에게 코카사스지방(현재의 조지아, 아르메니아 및 아제르바이젠)을 잃었다. 1828년에는 모든 외국시민이 이란 법정에서 제외되는 치외법권이 제정됐다. 이는 이란인에게 더 없는 굴욕감을 주었다.(1813~1828)(그림 7 참조)

카자는 중앙아시아를 러시아에게 빼앗기고, 아프카니스탄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영국에게 내줬다. 유럽의 이 두 세력은 카자 내정을 교묘히 조정하고 관리를 매수해 각종 이권을 획득했다.

카자의 부패와 실정에 대한 불만은 헌법혁명을 가져왔고, 최초로 이란국회인 마질리스가 개원됐다. 비록 이란은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는 면했으나, 1907년 북쪽은 러시아가 동쪽은 영국이 조정하는 두 개의 영역으로 분할됐다. 1차 대전 후 이란은 정치, 사회, 경제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1906)

레자 칸(Reza Khan)은 장교 출신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초기에는 국방장관으로 다음엔 수상이 됐고, 1925년에 왕(Shah)이 되기로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당초에 레자 칸은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고자 했으나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 축소를 염려해 그를 설득시켜 왕으로 추대했다.(1921)

팔레비 왕조(Pahlevi Dynasty) : 1925~1963

팔레비왕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앙정부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정예 상비군을 창설하고, 부족장의 자치권을 저지했다. 그는 일련의 현대화 계획에 착수했다. 그 중 하나는 특히 교육과 사법제도에 대한 성직자의 권한을 박탈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는 공교육을 제공했다. 현대식 대학교를 이란에 처음으로 세웠고, 여자에게 학교를 개방하고, 노동의 기회도 줬다.

그는 이란 최초로 현대화 계획을 시작해 수많은 도로, 교량, 정부소유 공장과 최초의 국가간 철도를 부설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기록했다. 1935년 그는 외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이란을 페르시아가 아닌 이란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이란사람들은 스스로 이 나라를 이란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여성 베일을 강제로 폐지하고, 국회(Majles)의 권한을 축소하고, 어떤 형식의 자유연설도 허용치 않았다.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연합국 측 가담을 거부하고 중립으로 남기를 원했다.(1925~1941)

소련에 전쟁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이란의 횡단철도가 필요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전쟁 기간 동안 이란을 점령했다. 레자 샤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찬성하며 강제로 퇴위됐다. 그리고 유배지인 남아프리카에서 1944년에 죽었다.

이란 국회는 국수주의 자인 모사데크박사(Dr.Mosasadeq)의 지원을 받아 이란석유를 영국의 관리로부터 벗어나려고 석유국유화 법을 통과시켰다. 영국은 자신들의 석유광권이 위협받자 격노해 파운드화로된 모든 이란 자산을 동결시키고, 국제재판소에 제소했다. 이 재판소는 이란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영국은 단념하지 않고 이란에 금수조치를 취하고, 해군력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이란 경제의 파탄을 유도했다. 영국 정보부와 미국 CIA는 이란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하에 모사데크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쿠데타를 지원했다. 젊은 왕은 쿠데타 와중에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줄 알고 이란을 떠났다. 얼마 후 모사데크 정부는 전복됐고, 왕은 권력의 자리로 되돌아왔다.(1951~1953)

아들 팔레비왕은 백색혁명을 시작했다. 여러 가지 내용으로 구성됐으나 중요한 것은 토지개혁, 노동자의 권리, 여성 참정권 등이다. 취약한 집행력 때문에 개혁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는 일련의 대중연설을 통해 이러한 계획을 공격했다. 그는 체포돼 추방됐다.(1962~1963)

이란은 비교적 안정된 정세에 힘입어 빠른 경제 성장과 번영을 경험했다. 이란의 인프라, 국민건강, 교육시설 등이 확장됐다. 여러 개의 고속도로, 도로, 교량, 철로, 수도, 하수시설, 공장, 학교, 대학교, 병원 등이 건설됐다. 군사력도 성장돼 국제적인 명성이 올라갔다.(1963~1973)

석유금수조치(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국에 대한 금수)는 이란의 석유수입을 4배로 늘려 연간 200억달러나 됐다. 이 새로운 부는 서방을 따라잡으려는 왕의 예정표에 박차를 가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란을 단숨에 현대화 하려는 왕의 결정은 문화적인 충격, 민중의 소외, 인플레이션, 부패, 경제상의 애로사항, 대대적인 도시화 문제, 상승하는 기대감, 이러한 사회, 경제, 정치, 문제를 다루려는 권위주의의 팽배 등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 말 왕의 반대파인 모든 정치 단체는 호메이니를 지지했다.

1979년 이슬람혁명에 의해 팔레비왕은 전복됐고 그 해 말에 이집트에서 죽었다. 군주 정치 2500년 만에 이란정부는 신정주의 공화국, 이란 이슬람공화국으로 바뀌었다.(1973~1979)

이란 문화는 외국의 침략, 유린과 핍박에서도 살아남아 숨 쉰다. 이러한 생명력의 근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인류를 향한 사랑의 시가 아닐까 한다. 인류의 두려움과 바람을 다루면서 페르시아 시는 종족, 문화, 종교, 언어 혹은 시대마저 초월하며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이란의 한 위대한 시인, 사디(Sa’di)는 7세기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The children of Adam are limbs of each other
Having been created of one essence.
When the calamity of time afflicts one limb
The other limbs cannot remain at rest.
If thou hast no sympathy for the troubles of others
Thou art unworthy to be called by the name of a man.

아담의 자손은 서로가 사지(四肢)를 이루니
이는 한 뿌리에서 생겨났음이라.
재앙이 한 사지를 괴롭히면
다른 사지들도 펀할 리 없다.
만약 타인의 불행에 동정심을 품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람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없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1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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