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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지식경제부를 기록하는 남자

사진으로 지식경제부를 기록하는 남자

  • 기자명 이권진 기자
  • 입력 2009.09.07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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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경제부 홍보기획팀 임용혁을 만나다

기록이란 문자만의 몫이 아니다. 단 한 장의 사진이 백 마디 말을 전하기도 한다. 사진이란 그런 것이다. 문득 오래된 앨범을 들춰보다 자신의 예전 사진과 조우하는, 낯설지만 살펴보게 되는 끌림 같은 거. 그리고 어둔 창고에서 뒤적뒤적 기억을 찾아내는 분주함이 요구된다. 그렇다. 사진에는 문자로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무늬가 있다. 그것이 현재의 나를 과거와 소통하게 하는 힘을 전해준다. 여기 사진으로 오랫동안 말을 걸어온 한 남자가 있다. 지식경제부의 모태인 동력자원부 시절부터 사진직으로 일하고 있는 임용혁 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쩌면 그의 21년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지식경제부의 생사고락을 들여다보는 뷰파인더인지도 모르겠다.

약속 시간을 1시간이나 넘겨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폭염이 한창인 7월말의 지식경제부 1층 로비에서다. 커피 종이컵 2개가 탁자 위에 구겨져 있었다. 꾸벅 허리 인사를 하면서 다가오는 임용혁 씨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입이 마른지 연거푸 생수를 들이켰다.

“이거, 죄송합니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 장관님 행사가 길어졌네요.” 평소 현장에서 선배 사진기자라고 생각했던 그를 이렇게 인터뷰이로 마주하니 생수 한 잔이 절로 간절해졌다.

이를 테면 그의 일이란 지식경제부 장관 및 1, 2차관의 행적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0분 행사 촬영을 하면 1시간 작업을 해야 한다. 1시간 촬영하면 2시간 나머지 작업을 한다. 그 작업은 원본 보정, 설명달기, 기록, 내부문서작업, 홈페이지 홍보, 언론사 배포 등 촬영에 2배가 필요하다.

기록물로 남은 사진들이 다시 그의 손을 타고 지식경제부 홈페이지는 물론 전국 언론 매체를 통해 세상에 빠르게 알려지는 것이다. 그의 업무를 두고 간단한 일이 아니냐, 하고 평가할 수 있지만 결국 이렇게 자신의 인터뷰 약속 시간 하나 마음대로 맞출 수 없는 어려움이 있는 보직이다.

임용혁 씨는 일주일에 평균 15회 현장을 나간다. 하루 3건이 기본이다. 장, 차관의 지방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최대 25회의 일정도 소화한다고 한다. 장, 차관직의 특성상 외부 행사가 많다보니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전국을 숨 가쁘게 도는 것이다.

“저는 지식경제부를 대변하는 사진기자라고 자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장관님만 열여덟 분을 모셨던 것 같아요. 매일 그분들의 일정에 맞춰 현장에서 뵙다보니까 어느 때는 형님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솔직히 다른 분들에게 어려운 부분이지만 장관실에 자주 들락거리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지식경제부 안에 차관님, 비서실 관계자 그리고 마지막이 저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만큼 지식경제부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부여된 권한이지만 오히려 무거운 책임이기도 합니다.”

장, 차관실을 자유롭게 들락거린다고 해서 그에게 든든한 배경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지식경제부 안에서 밖에서도 그의 머리는 언제나 무겁다. 현장에서도 까마득하게 어린 취재기자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이도 임용혁 씨다.

“인사는 머리를 숙여서 하는 것이죠. 웃음과 함께 하는 인사 말입니다. 먼저 인사를 하면 90%가 저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말단 직원에게도 먼저 인사를 하고, 경비아저씨에게도 인사를 합니다. 내 허리가 굽어지는 한은 인사를 하겠다. 겸손한 자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빠르게 통할 수 있는 길이더군요.”

“100년 전 지식경제부 궁금하시죠”

사진기록에 대해 임용혁 씨의 생각은 우물처럼 깊다.

“저희가 하는 것은 지식경제부의 기록을 100년, 200년 후에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년 동안 기록된 사진들은 최대 4000장에 이릅니다. 정부 기록물보관소에서 안전하게 보관되면 언제라도 열람할 수 있게 되죠.”

무엇보다도 지식경제부는 정부 부처에서 최초로 2002년부터 사진기록을 전자시스템으로 전환했다. 기존에 원본을 통째로 보관하면서 겪게 되는 공간의 문제를 비롯해 습기 등 외부 환경의 문제를 단박에 해결하게 됐다. 지식경제부 정보화담당관실에서 이러한 시스템 작업 구축에 도움을 줬다.

사진기록을 위한 그의 일정관리는 꼼꼼하다. 보통 조찬이 있는 경우에는 전날 저녁에 동선을 확인하고 아침 일찍 현장에 바로 간다. 장관을 포함해 주빈이 도착하기 전에 대기하는 것이 철칙이다.

현장에 도착하는 과정부터 촬영은 시작된다. 담소를 나누는 모습, 협약식 하는 사진, 의미가 담긴 장면 등이 렌즈에 담긴다. 순간을 포착하는 노련한 움직임을 본다면 사물을 빨아들인다는 표현도 과하지는 않다.

그는 지식경제부를 홍보하는 자신의 업무를 하나의 작은 일이라고 낮춘다. 치켜세우는 일에는 주변 사람들의 공을 내세운다. 장, 차관의 역할이 크지만 밑에서 조용히 일하는 숨은 일꾼들, 예를 들어 지식경제부 기자실을 관리․지원하는 직원이나,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보도를 담당하는 직원들 등 홍보와 관련된 모두의 노력이 톱니바퀴로 잘 돌아간 결과라는 설명이다.

“임 대변인님, 안녕하세요”

임용혁 씨의 입사년도는 1988년이다. 그는 당시 8명의 전임자가 하지 못한 직급 전환을 한 만큼 일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남다른 인물이다.

“예전에는 고용직의 직급이 없었습니다. 전임자 아무도 직급을 바꾸려 하지 않고 기간이 만료돼 나갔습니다. 저는 제가 팀으로 전환하고 노력하고 해서 현재 6급까지 왔습니다. 1998년에 6급을 달았고 여전히 그 자리이기 합니다. 아내는 만년 6급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하죠.(웃음) 하지만 저도 왜 승진이라는 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생활하다 보니 도리어 승진에 목을 매기 보다는 역할에 목을 매고 하자는 생각이 듭니다. 답은 거기서 나오지 않을까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임용혁 씨를 현장에서는 여러 호칭으로 부른다. ‘형님’ ‘홍보실장님’ 등 가까운 사람이 부르기에 도가 지나치지 않는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로운 호칭 때문에 당황한 적도 있다고 한다. 어느 행사장에서 국장과 동행한 그를 가깝게 지내던 취재기자가 “임 대변인님,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어온 것.

“국장님이 웃으며 받아들이긴 했지만 제 마음은 사실 좀 불편했어요.” 그가 눈을 크게 끔벅이며 회상을 한다. 취재기자인 나로서도 현장에서 기자들이 그를 ‘홍보실장’이라 부르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가 단순히 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지식경제부 전체를 홍보하는 것이라는 걸 이미 업계 기자들도 동감하는 것이다.

“저기 뺑소니 혐의가 있으니 출두하세요”

지식경제부 장관의 지방 출장은 007 첩보작전과 같이 시간과의 싸움이다.

산업체 현장이 많은 부처 특성상 장관의 하루 지방일정에는 평균 3~4군데를 도는 일이 부지기수다. 따라서 임용혁 씨는 출장길 자동차와 얽힌 사건들이 많다고 한다. 한번은 지방 출장길에 옆 차선에서 임용혁 씨의 차 옆구리를 박고 들어오는 아찔한 사고가 났다.

하지만 장관 관용차가 저 멀리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임용혁 씨가 명함만 주고 사라졌던 것이 화근이 됐다. 다음날 경찰서에서 뺑소니로 신고가 돼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결국 상황을 파악한 경찰 담당자는 오해를 이해로 풀었다고 하지만 당신의 긴박한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예다.

이밖에도 관용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능이 떨어지는 그의 자동차는 한 여름 고속도로에서 픽픽 정신을 놓는 에어컨으로 혹서기 드라이빙을 경험하게 되고 타이밍벨트가 끊어져 응급처치로 운행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전한다. 여기에 장관 관용차의 경우 버스전용차로로 달리며 일정을 소화하기도 하는데 이를 따라잡다가 번번이 교통규칙 위반 딱지가 날아온다고 하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사실 장, 차관님 일정을 숨 가쁘게 따라가다 보면 운영경비가 많이 들어요. 초창기에는 지방출장을 갔다가 오면 유류비가 많이 나와 당황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죠. 지방을 다녀오면 공무원 출장비 4만원을 받아도 5~10만원의 개인 지출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그런 거 계속 머릿속에 담으면 일하기가 힘들어요. 지금은 아내도 이해를 해줘서 고마워요.”

야구대회 그리고 가족 이야기

임용혁 씨는 지식경제부에서 야구대회를 창단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1991년 동력자원부 시절, 석유산업과 고 박기태 사무관과 합심해 월급을 털어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지식경제부 장관배 야구대회는 10회를 유지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식경제부팀을 비롯해 산하기관들이 모여 그 실력을 겨루는 장이다.

“현재는 현장감독을 하고 있습니다. 즐기는 야구 누구나 나오면 박수를 받고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게 그 취지죠.” 무엇보다 지식경제부 야구대회는 스포츠를 통한 인맥 만들기의 결정판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렇다고 그 인맥이라는 것이 어떤 목적성을 갖자고 하는 건 아니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듯이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눈빛은 서로에게 정겹고 깊다.

업무와 여가활동으로 바쁜 그에게 가족 이야기를 묻자, 그의 얼굴이 더욱 환해지고 말이 빨라졌다. “쇼핑몰 ‘쇼부’를 운영하는 딸이 있어요. 얼마 전에도 발리에 촬영차, 보호자겸 함께 갔다 왔죠. 20대 쇼핑몰 중에서 10개 손가락에 든다고 하네요. 대박은 아니지만 쪽박도 아니죠. 자기 일도 좋지만 연예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했으면 좋겠어요.”

그의 가족 이야기는 감사와 미안한 마음 빛을 보여주는 것으로 계속됐다.

“술과 담배까지 끊어가며 본 우리 아들은 이제 중1인데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아버지로써 조언도 해주며 든든하게 밀어주고 싶네요. 집사람에 대해서는 뭐, 여전히 고맙고 또 고마운 거 그 말부터 시작 안하면 어떤 말도 붙일 수 없게 모든 게 다 고맙죠. 허허.”

지식경제부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임용혁 씨. 그를 지탱하는 힘은 솔직하면서도 겸손한 자세에 있다. 기자가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것처럼, 그는 묵묵히 지식경제부의 오늘을 사진기에 담아 세상과 소통한다. 그래서 그가 찍은 사진을 보면 마치 오랫동안 아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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