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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III]

우리는 이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III]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1.05.0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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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이 시작되다

1979년 2월 망명 중이던 호메이니는 이란 임시정부초청을 받고 귀국했다. 이 초청은 샤 임시정부를 멸망의 길로 재촉했다. 팔레비왕정의 요인들은 무수히 숙청됐고, 수 백명 이상이 사형에 처해졌다. 혁명재판소가 테헤란 학교건물에 즉시 설치됐고, 이어서 각 지방에도 이와 같은 재판소가 설치됐다. 테헤란 혁명재판소는 4명의 샤정부 장군을 총살시켰고 군인, 경찰간부, 정보부원(SAVAK agents), 정부각료 등을 무수히 처형했다. 그 밖에 샤정부 요인들도 죽음을 면할 길이 없었다.

1979년 3월 이란은 정부형태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용지에는 단 하나의 정부형태인 이슬람공화국만이 표기돼 있었으며, 투표율은 98%인데 이는 물론 비밀투표는 아니었다. 매디 바자르간(Mehdi Bazargan)이 수상으로 임명되고, 진정한 혁명이라는 미명아래 무정부상태가 이란을 휩쓸었다. 혁명 중앙당국에 대답조차 변변히 못하는 반쪽짜리 혁명위원회는 정부의 많은 임무를 인계받았다.

공장노동자, 공무원, 사무직노동자, 학생 등은 자신들의 조직을 직접 운영할 것을 주장하거나 우두머리를 직선하겠다고 요구했다. 정부 총리에 의해 임명된 총독, 군 지휘관, 고급공무원 등은 왕왕 저급 공무원이나 지방 주민들이 거부했다. 이와 동시에 혁명위원회를 장악하고 있는 호메이니는 자신의 독자적인 혁명정부를 운영하는 바 이란은 이슬람주의 신정(神政)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이들은 목적을 달성하려고 거리의 폭도들을 이용해 혁명계획을 강행했다.

이란은 또 쿠르드계, 아랍계, 터키계, 기타 소수종족들이 여러 형태의 자치권을 요구하며 반항하는 소요사태에 시달렸다. 1979년 8월부터 혁명재판소는 이러한 소요사태에 가담한 소수 종족자들을 무자비하게 사형에 처했다.

1979년 5월 호메이니는 이슬람혁명수비대(Pasdaran, IRGC)를 창설했다. 이 수비대는 혁명과 성직자 리더에 충성을 다하며, 일반 정부에 속한 일반 정규군과는 차별화됐다. 그 후 또 호메이니는 바시즈(Basij)라는 자원봉사대를 결성했다.

이 두 그룹은 국내에서는 혁명노선에 따르는 정부를 보호하고, 대외적으로는 외적과 맞서 싸우는 충직한 집단으로 칭송받았다. 그리고 그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라고 믿었다. 또 IRGC는 해외에서 정부에 반항해 이슬람혁명을 유도하는 혁명수출에 이용됐다. 특히 레바논에서 헤즈볼라 창설 기반구축에 큰 도움을 줬다.

혁명정부는 권력이 성직자들에게 집중됨에 따라 우파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좌파신문은 폐간시켰고, ‘국가민주화 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 집회는 불허했다. 반대파의 리더는 체포 구금되고 점차 성직자들의 권력이 더욱더 집중되자 국유화가 시작되고 종교적 박해,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해졌다.

샤를 무너뜨리고 이란 민주화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하던 학생들의 실망과 좌절은 매우 심각했다. 호메이니와 여러 성직자는 과격분자를 풀어주고, 미국과 걸프지역의 동맹국에게 위협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수상의 지휘 하에 있는 정부는 군대와 석유산업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속품을 조달하기 위해 미국과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인질 사태

이란의 혁명은 마치 프랑스와 소련혁명의 대본을 읽는 것과 같다. 국내는 대혼란에 빠져 반혁명세력을 극심하게 억압하고, 해외에서는 분쟁에 말려들고, 이로 인한 내정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979년 11월 1일 바자르간 이란수상은 카터정부 국가안정보장 고문인 브르제진스키(Zbigniew Brzezinski)를 알제리에서 만났다. 또 한편에서 미국정부는 암 말기로 쇠약해진 팔레비왕의 치료를 조건으로 미국입국을 허용했다.

이란인은 팔레비왕이 이 방문을 통해 이슬람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계획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1979년 11월 1일 테헤란에서 팔레비왕의 본국송환을 요구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신문기사는 바자르간이 미국의 요직 공무원을 만난다고 비난했다. 11월 4일 이란 이슬람 학생들은 미국대사관을 습격해 대부분이 미국인인 66명의 인질을 잡았다. 이중 14명은 11월 말 이전에 풀려났고, 이로 인해 바자르간수상은 사임했다.

혁명위원회는 호메이니와 관련이 있는 바니 사드르(Abolhassan Bani Sadr)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때까지 수상기능을 맡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호메이니의 지지를 받았으나 법치와 시민의 권리를 거듭 주장했기 때문에 혁명위원회의 비호를 받으며 수상으로 임명된 라자이(Mohammad Ali Razai)와 충동이 잦았다. 이로 인해 숙청의 회오리바람이 군과 공무원 사회에 거칠게 몰아쳤다.

한편 이 인질사태는 미국은 물론 서방 유럽 국가들과의 유대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카터대통령은 미국과 그밖에 해외 은행에 있는 수십억 달러의 이란자산을 동결했다. 바니 사드르는 이 사태를 수습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팔레비는 파나마로 거처를 정했다. 바니 사드르와 외무장관은 파나마당국이 팔레비를 체포해 이란으로 송환해 줄 것을 시도했다. 그러나 손도 써보기 전에 팔레비는 1980년 3월에 이집트로 향했다.

1980년 4월 미국은 인질을 구출해보려고 비밀리에 비행기와 군대를 타바스(Tabas)근처 이란 동부사막에 있는 ‘사막 1호’라는 작전기지에 상륙시켰다. 이 계획은 완전한 실패였다. 헬기 2대가 추락했고, 후퇴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헬기와 수송기 C-130이 충돌해 8명이 사망했다.

인질석방 협상은 1980년 9월 14일 서독에서 시작해 다음해 1월 성공적으로 끝났다. 퇴임하는 커터대통령에게 굴욕을 안겨줬고, 실질적인 인질석방은 1981년 1월 20일 레이건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직후에 이뤄졌다.

이란-이라크 전쟁

그간 계속되던 이란과 이라크간 긴장은 드디어 1980년 4월 국경에서 사건을 발발시켰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은 분명히 이란을 희생시켜 영토를 확장할 수도 있었고, 나아가 보수파 수니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나 사담자신의 이라크정권에게 위협적인 이슬람공화국의 전복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란 선전자들은 페르시아만 전역에 걸쳐 이슬람혁명의 메시지를 퍼트렸고, 이라크 사람들은 이 선전이 사담의 억압하에 있는 이라크 시아파에게도 전염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란과 이라크의 관계는 국경지형을 기준으로 좌우됐다. 이란 이라크간의 분쟁은 주로 1975년 알제리협약에 의해 조정되는 항해권(航海權) 때문에 일어났다. 이라크가 이 지역을 영토로 삼으려고 욕심을 냈기 때문이다.

1980년 9월 17일 사담 후세인은 알제리협약을 폐기하고, 9월 22일 이라크 외무장관을 암살 시도했다는 핑계로 이란에 대거 침입했다. 당시 이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이란의 대외정책은 사실상 모든 국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했다. 호메이니는 특히 미국을 ‘거대한 사탄국가’라 불렀다. 이란은 전쟁 내내 이슬람혁명을 계속 시도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시아파공동체의 소요를 유발했고, 레바논에서는 테러에게 무기를 주면서 고무시켜 미국과 영국국민을 납치하도록 종용했다.

이란은 미국산 무기의 부속품을 확보할 수도 없었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서방국가의 물품도, 또 국제차관마저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소련을 포함한 많은 서방국가로부터 군사 외교지원과 시리아를 제외한 아랍권 국가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이 전쟁을 치르면서 호메이니는 전쟁 주도권을 정규군에게 주는 것을 주저했다.

이 군대의 충성심과 정치적 신뢰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부실하게 훈련된 혁명수비대를 믿고 투입했다. 이라크는 몇몇 전투에서 독가스를 살포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이란 이슬람 정부의 전복을 기대하며 이라크에 상당한 무기를 지원 판매했다.

이 기간 동안 이란은 또한 쿠르드족의 봉기, 모아헤딘(Mojahedin, 이슬람/막스 무장단체), 그밖에 단체들과도 싸워야 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이 전쟁은 양측에 100여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대내외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란인이 놀랍게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별다른 대책이 없어서 그저 인해전술로 공격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인구밀집지역은 물론 일반 선박까지도 공격됐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와 달리 독가스나 화학무기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호메이니는 모든 종전 중재노력을 거부하고,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권좌에서 축출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국은 1988년 이라크가 이득을 얻은 후 유엔의 절충적 평화안에 동의했다.

전쟁과 정규군대, 혁명수비대간의 라이벌의식은 정규군 편인 바니사드르대통령과 성직자정부의 혁명군편에 선 라자이수상간의 불화를 심화시켰다. 1981년 6월에 싸움에서 패배한 바니사드르 대통령은 탄핵됐다. 수상인 라자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나 8월 수상과 함께 모아헤딘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폭탄테러에 숨졌다. 그 후 1981년 10월, 하메네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정부는 비교적 온건파 요인들을 권력으로부터 쫓아내고 이슬람법제도와 사회 및 도덕적 행동에 이슬람규법을 강요하면서 다시 우파로 선회했다. 반대파인 모아헤딘과 공산당연합은 조직을 정비해 무력으로 이슬람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다.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엄청난 기세로 탄압과 백색테러를 감행했다.

혁명정부는 매일 50~100명단위로 사형을 집행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바니사드르대통령 탄핵 후 2만9946명이 사형에 처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는 더 많았으나 이란정부가 축소보고 했다고 본다. 그 처참한 만행을 저지른 혁명정부는 그 전모를 축소하려고 은닉했을 것이다. 1983년 2월 정부는 이란공산당(Tudeh Party) 간부와 당원 1000여명을 체포했다. 당 간부는 투옥시키고, 당원을 무수히 죽였으며 공산당을 금지했다.

은밀한 무기거래(Iran-Contra Affairs)

비록 미국은 공식적으로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지 않았지만 1985년 레이건행정부는 스스로 제정한 법규(무기금수조치법)를 저버렸다. 교묘한 스왑거래(Swap Deal)방식으로 이스라엘 또는 여타 중개국을 통해 토우(TOW) 및 호크(Hawk)미사일과 중무기를 이란에 팔아 그 대가로 받은 현금을 불법적으로 니카라과 정부에 재정 지원했고, 몇 명의 미국인 인질을 구출했다고 한다. 이 무기판매는 1986년 말 백일하에 드러났고 청문회까지 했으나 국익을 위해 있을 법한 일이라며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1988년 미국군함 빈세니스호(Vincennes)가 290명이 탑승한 이란 민간 여객기를 격추시켜 몰살시켰다. 그리곤 실수일 것이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침내 1988년 양국은 유엔의결을 받아들여 8여년간의 전쟁은 종결됐다.

라프산자니와 하메네이 (Rafsanjani and Khamenei)

호메이니는 1989년 6월 3일 심장마비로 죽었다. 하메네이대통령은 최고종교지도자(SPL:Supreme Spiritual Leader)역을 담당했다. 지도자전문가회의(Ulama, 86명의 이슬람학자들로 구성되며 SPL을 선출하고 감독함)가 긴급 소집돼 하메네이를 최고지도자로 선출하고 아울러 아야톨라(시아파 유력종교지도자)로 추대했다. 의회 의장인 라프산자니는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란경제는 전쟁, 서방국가의 금수조치, 산만하고 부적절한 경제정책 등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다. 초기 높은 출산율 정책은 통제 불가능한 인구재해를 초래했다. 그 후 이 정책은 수정 개선돼 지금은 중동국가 중 인구 증가율이 가장 낮다. 교육투자를 늘리고 여자교육을 개방하며 문맹률을 줄이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높은 실업률이었으며 한쪽에선 마약 중독자가 늘고 있다는 소문까지 생겨났다. 식량부족은 수시로 폭동을 일으켰으며 가장 큰 식량 폭동은 1991년에 일어났다.

하타미(Khatami)

1997년에 당선된 하타미대통령은 정치개혁과 자유화를 추구해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그는 서방과의 관계 정상화 및 인근지역과의 긴장 완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민주화 노력은 절대 결정권을 가진 최고위원회의 거부권으로 좌절됐다. 시급한 문제점은 간통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고, 정치적 반대파 정기적인 숙청감행, 신문 잡지 기사통제 등 허다했다. 이란의 여성지위는 다른 이슬람의 그것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나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곳곳에 남아있다.

시아파인 이란은 수니파인 알카에다 조직을 지원하기 보다는 오히려 알카에다 체포에 협력하고 있다. 그러나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지역의 이슬람 지하드, 그 밖의 이집트 테러집단 등 다른 테러집단을 지원한다. 이란 정보부와 헤즈볼라가 아르헨티나의 유태인센터를 폭파시킨 배후 세력이다. 1980년대 레바논의 미대사관과 해병대막사를 폭파시킨 책임은 분명히 이란과 헤즈볼라에게 그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란의 돈을 받은 집단들이 미국인과 유럽인들을 잡아들여 인질로 삼고 있다.

헤즈볼라와 이란 테러의 배후 지도자는 이마드 모흐니(Imad Moughnieh)이며, 2008년 다마스커스에서 이스라엘 정보원 아니면 이스라엘을 돕는 타국의 정보원에 의해 살해됐다. 2002년 1월 이스라엘 안전수비대는 이란에서 무기를 싣고 출항했다는 이유로 선박 ‘카린 A’호를 압수했다. 그런데 과연 이란 정부가 승인한 것인지 아니면 무기 밀매업자의 소행인지는 그 후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하타미는 2001년 비교적 자유스러운 선거로 다수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재선됐다. 이란사람들은 그만이 개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민주화세력의 학생데모와 하타미개혁 지지세력 등의 운동은 항상 의회세력 및 경찰력과의 반복적인 마찰을 일으켜 이란 정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란의 핵 개발계획

2003년 말이 다가오면서 이란의 핵개발계획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정밀조사를 받게 됐다. 팔레비 시절에 시작된 원자로건설은 지멘스에 의해 부쇠르(Bushehr)에서 계속됐고 혁명이 발발한 1979년에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핵개발계획은 반이슬람적이라고 선언했다. 이라크는 양국 전쟁 시 부쇠르기지를 폭파시켰다. 그러나 이란은 이어서 새로운 핵개발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국가들은 스리마일 아일랜드의 불상사와 소련 체르노빌 대 재해로 인해 원자력에 대해 호의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석유사용에 의한 공해와 종국에는 고갈된다는 사실을 인용하면서 화석연료의 대체 에너지로서 원자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테헤란은 자동차와 정유공장의 배기가스로 공해가 극심했는데 그 원인 중에 하나는 유가를 정부가 보상해 줬기 때문이다.

비록 전세계 매장량 중 석유 9%, 가스16%를 보유하고 있어도 이슬람혁명이 끝나면 석유시설의 필요한 부품과 석유기술 확보가 곤란해 이 풍부한 석유 가스 자원을 이용하기 어렵다고 간주했다. 이란의 석유와 가스매장량은 에너지수요증가를 감안해도 향후 수십년간은 이란이 필요한 에너지를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이란은 이라크가 파괴시킨 지멘스원자로를 대체해 소련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 개발사업은 이란도 서명한 핵확산금지조약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를 받게 된다. 정보제공자에 따르면 이란은 국제원자력기구와 세상을 속이며 또 다른 비밀 핵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란은 과거 수많은 가스 원심분리기를 제작 설치했다. 이 시설은 이란이 비교적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저순도 우라늄광석을 정련(精鍊)해 원자로 연료 순도의 우라늄을 생산하는데 사용되며 나아가 전쟁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 235도 정련이 가능하다.

이란은 지금까지 1000kg의 저순도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으며 좀 더 정련하면 핵폭탄을 만들 수도 있다. 이란이 핵무기를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 핵보유능력과 균형을 유지하고, 파키스탄을 견제하려는데 정치 군사적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추가적으로 이란은 중수(重水)공장과 다른 시설을 나탄즈, 아크, 그밖의 지역에 건설하고 있는데 소련이 부쇠르에 건설하는 원자로는 중수가 필요치 않다. 아크 중수실험로는 플루토늄의 핵분열을 일으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

미국정보부는 이란이 핵무기개발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2003년에 종식했다고 믿고 있는데 재개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IAEA의 보고서는 이란이 핵무기개발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으나 이란은 모든 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사드, 이스라엘의 정보부, 다간(Meir Dagan) 부장은 이란은 2014년까지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며 미국정보기관의 의견도 이와 같다. 그러나 다른 기관에서는 그보다 빠른 시일 내에 보유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가난한 나라가 엄청난 석유와 가스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왜 막대한 투자를 핵개발에 쏟아 붓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단지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암시만을 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스라엘과 미국 양국은 이란의 핵개발계획을 큰 관심을 가지고 주시해왔다. 이스라엘이 1981년 이라크 오시락 원자로를 격파한 것 같이 부쇠르 원자로를 격파하려는 모험을 감행하더라도 사정은 다르다. 즉 부쉬르는 핵연료를 만드는 증식로가 아니며, 이곳 말고도 도처에 핵시설이 산재해 있어 부쇠르를 격파한들 이란 핵개발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IAEA조사자들은 이란이 알려준 핵개발계획과 실제 핵기지에서 찾은 고농축 우라늄과의 차이점에 관해 우려하면서 이란에 핵개발계획 전모를 밝히고, 필요시 언제라도 즉각 핵기지를 추적 조사할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란은 초기에 다소 반항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고서도 미리 제출하고 핵농축사업도 중지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라늄농축을 재개했고, 이미 5%의 농축 우라늄을 1000kg 이상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하모드 아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jad)

2005년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개혁적인 하타미의 뒤를 이었다. 그는 국내외에서 강경노선을 견지했다. 복장규정과 소수민족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동성연애자는 교수형에 처했다. 그는 또 대외적으로는 유엔이 요구하는 우라늄농축제지를 거부하고,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주의를 내세워 유대인대량학살을 부정하고 반유대주의 운동을 펼치면서 시오니즘과 미국이 없는 세상이 우리의 목표라고 맹세했다. 부시행정부는 유엔으로 하여금 이란에 대한 금수조치를 더욱 강화케 하면서 대립정책으로 맞섰다.

이란은 어떠한 적극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비록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군사적 타격이 임박했다고 소문은 자자했으나 이 소문은 아직까지 헛소문에 불과하다. 그리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적대적이 아니라 ‘참여의 정책(The Policy of Engagement)’을 추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성과가 없다.

2009년 6월 이란에서 대선을 치렀다. 그 결과는 의아스럽게도 아마디네자드가 대승했다. 그러나 반대파는 분명히 부정선거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반대파의 지지자들은 부정선거를 항의하며 거리로 나섰으나 정부는 당선철회를 거부하고, 진압에 나서면서 적게는 20여명, 많게는 150여명 정도가 살해됐다. 그리고 더 많은 인원이 체포됐다. 전화와 여타 통신시설은 모두 제한됐다. 반대파는 인터넷과 트위터를 통해 항거를 도와줬다. 그러나 속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진정한 싸움은 아야톨라 하메이네와 아야톨라 라프산자니간의 세력싸움으로 귀착된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1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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