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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Ⅳ]

우리는 이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Ⅳ]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1.06.0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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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에 걸쳐 이란의 역사와 현실을 간단하게 알아봤고, 지금부터 파란 만장한 역사를 가진 이란 석유 이야기를 두 번에 나눠 알아보려고 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란은 장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문명의 원동력인 석유까지 가졌음에도 아직까지 어렵게 사회적 혼란 속에서 살고 있으니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그 역사와 문화는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누구를 위한 석유이며,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한번 반문해보고, 원인을 알아내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어떨까 한다.

1901년 영국인 윌리엄 넉스 달시(William Knox Darcy)는 북부 5개 주를 제외한 이란전역의 석유광구개발권에 대한 카자르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그 결과 이란에서 처음으로 시추기 회전이 시작됐고 이에 따라 이란은 석유자원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중동 지역의 석유개발발상지가 됐다. 그로부터 한 세기 즉 100년이 지났으며, 이제 새로운 100년을 향해 출항하고 있다.

지난 100년간 이란석유산업은 기술적 및 공업적 측면에서 이란인에게 현대 과학의 문을 열어주는 한편, 외국인의 깊은 관여는 이란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발전기반으로 작용했다.

주요사건별로 보면 1908년 마지드 소라이만(Masjid-e-Solaiman)에서 최초 시추공으로부터 석유분출, 1913년 아바단에 정유공장 건설, 1933년 달시 광구계약 연장실패와 불리한 신규광구계약체결, 1950년 석유산업 국유화 운동 성공, 석유자원의 과도한 낭비 등 비극적인 사건을 포함해 많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같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뼈아픈 교훈도 얻었다. 이슬람혁명의 성공은 모든 법규와 규제를 철폐했고 외국 고용자를 철수시켜 자국 전문가들이 모든 업무를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이란 정부는 비록 외부세력의 강요된 전쟁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이를 복구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등 대대적인 재건사업을 착수했다. 이란의 석유산업은 모든 뜻있는 변화의 기반으로서 국가성장 발전과정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중동의 최초유전은 어떻게 발견됐나?

1901년 5월 28일 악명 높은 달시석유광구계약 서명은 이란석유산업의 출발을 알리는 그 첫 획이 됐다. 그리고 이슬람혁명은 독자운영을 기리면서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고대 이란에서는 지표에 누출된 석유나 역청(瀝靑: 아스팔트, 콜타르, 피치 등)이 전통적인 원시방법으로 사용됐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석유산업이 태동되기 시작할 때(1859)쯤 이란에서도 몇몇 광구에 대한 승인을 받아 첫 단계사업으로 두 곳에 시추를 했으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유징은 발견했으나 석유산출 시험결과 미미해 이곳에서 계속해서 시추를 할 수는 없게 됐다.

시추장비는 보다 남쪽인 슈스타르 지역으로 이동됐다. 전문가들은 이 지역에서 시추성공을 낙관했으나 달시의 자금 부족이 문제였다. 이 지역에서 시추를 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드는데 달시 개인적으로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는 1904년까지 당시로서는 막대한 액수인 22만 파운드의 자금을 지출했다.

이 자금문제는 버마(현 미얀마연방공화국)에서 광구개발권을 취득하고 랑군에 정유공장을 세운 스콧티시석유회사(Scottish Oil Company)에 의해 해결됐다. 당시 영국 해군본부는 전함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필요한 양은 연간 5만톤(37만배럴)이었다. 영국정부는 이 석유소요량을 부득이하게 스콧티시의 버마석유회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회사가 보유한 석유매장량으로는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기에 충분치 못했다.

석유기술자들은 버마석유광구에서 더 이상 사업 확장을 권고하지 않았다. 만약 버마석유회사의 재정능력을 전용해 달시 광구에 투자한다면 해군본부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달시와 버마석유회사간의 협상결과에 따라 스콧트랜드 글라스코에 본사를 둔 신규 회사가 설립됐다.

이 회사는 마스지드 솔라이만 지역에서 버마회사의 자금을 지원받아 시추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 회사는 박티아리 부족장과 협상을 통해 회사의 재산과 시설물을 보호해주는 대신 그 대가로 얼마간의 대금을 지불하는 계약에 합의 했다. 중앙정부관리가 불참한 가운데 영국영사가 협상을 주관했기 때문에 이란정부는 전혀 이 사실을 몰랐었고, 레자 샤(Reza Shah)는 1924년에 이 계약을 공식적으로 취소해 버렸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몇 곳에 시추작업은 계속됐다. 북쪽 아와즈에 2개공을 시추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마침내 1908년 5월 26일 마스지드 솔라이만 첫 시추공에서 석유가 발견됐으며, 산출시험결과 전문가들이 찾던 광구임이 입증됐다. 둘째, 셋째 시추공에서도 대규모 저유층이 발견돼 마침내 마지드 솔라이만이 세계석유역사상 중동 최초 유전으로 등록됐다. 그러나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시추책임자 레이놀즈(Reynolds)가 기쁨에 벅차 아와즈(Awaz: 근처의 큰도시)로 돌아가려는데 스콧트랜드 본사로부터 석유를 찾기 2주 전인 5월 14일자 서신을 받은바 그 내용인즉 석유를 아직껏 찾지 못했으니 그 곳의 모든 시추장비를 코람샤로 즉시 옮기라는 불만에 찬 경영진의 엉뚱한 업무지시였다.

앙그로-이란 석유회사 설립(AIOC: Angro-Iranian Oil Company)

1908년 마지드 솔라이만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버마석유회사와 영국의 재무상 스트라스코나 경(Lord Strathcona)이 합자해 중동 최초로 앙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APOC : Anglo-Persian Oil Company)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1935년에 앙그로-이라니안 석유회사( AIOC : Anglo-Iranian Oil Company)로 개칭 됐다.

달시는 모든 광구 지분은 새 회사에 넘겨주고 이사직만을 갖게 됐다. 석유생산과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다. 향후 정유공장 건설예정지인 아바단(Abadan)까지 원유수송 송유관이 부설돼야 하고 아울러 유조선 접안시설, 저장탱크 등 항만 시설도 갖춰져야만 했다.

ASIOC는 페르시아 주재 영국 외교관들과 오랫동안 교분이 있는 코람샤의 카잘 족장과 합의서를 체결하고 정유공장부지는 회사 자의로 선정해 사용했다. 그 대가는 매년 대지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 외에 10만파운드의 차관을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외교대표부는 족장과 그 가족을 영국 정부가 지원 및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석유회사(AIOC)는 영국외교관을 등에 업고 이란의 중앙정부를 배제하면서 석유사업 추진에 필요한 입지를 강화했다. 회사의 이러한 사업 추진 방침은 후일 레자 샤가 부족장과 족장들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압박을 가하는 빌미를 주게 됐다.

레자 샤가 권력을 가지고 통치하면서 15년 동안 중앙정부가 더 이상 무시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1941년 8월 25일 영국군대가 이란에 상륙하면서 종전과 같은 방법으로 또는 더 심하게 중앙정부를 배제하면서 사업을 추진했다.

이란정유공장의 제품수출

1909년 10월 정유공장 건설이 착수 됐다. 회사 고용인은 시추 기술자, 기계공, 회계 등에 제한됐음에도 1911년 2500명에 달했다. 비행기가 이란에 최초로 착륙한 곳이 이곳이었고, 1912년 원유수출이 처음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마지드 솔라이만 지역 30여개의 시추공에서 원유가 뿜어져 나왔다. 회사와 영국정부간에 방향이 바뀌어 후자가 대주주가 되는 계약이 체결됐다.

그 후부터 영국의회는 1차 세계대전 전날 밤인 1914년 6월 17일 법안을 통과시켜 회사에 2명의 이사진을 두고 영국정부시책에 반하는 모든 안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영국해군성과 회사 간의 비밀 협약에 따라 회사는 영국해군이 필요로 하는 석유연료 전량을 떠맡았다. 그리고 석유가 가장 중요한 전략 물자라는 사실이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입증됐다.

다만 용도가 다를 뿐이지 석유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전쟁에서 이용됐다. 역사학자들은 고대 전투부대의 조직을 설명할 때 항상 기마병, 보병, 궁수병, 유척병 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현대전에서 석유사용은 보다 광범위하다.

육지에서 엄청난 기동력과 화력은 물론 바다와 공중에서도 대단하다. 석유가 없었다면 개인장비, 탱크 및 전투기는 가동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해 쿨존경(Lord Curzon: 인도총독, 영국외무대신 등)은 1차 대전 종전 후 “전쟁은 석유의 물결 때문에 이겼다”라고 했다.

분 쟁

영국은 달시를 통해 이란 석유 광구를 획득한 것을 높이 평가한 반면 이란은 석유회사나 영국정부가 전혀 달갑지 않은 존재일 뿐이었다. 영국정부와 회사는 석유의 중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탐욕과 욕심도 함께 커져만 갔다.

비록 이란은 1차대전시 중립을 선언했지만 교전중인 군대는 이란 영토를 전쟁터로 바꿔 놓았다. 마지드 솔라이만에서 아바단 정유공장까지 연결된 송유관은 독일의 사주를 받은 파괴자들에 의해 운행이 중단됐으며 그 복구는 5개월이나 걸렸다.

레자 칸(Reza Khan)과 석유문제

레자 칸은 1921년 쿠데타의 결과로 정치에 입문했고 1923년에 수상이 됐으며, 1925년에 왕으로 즉위해 팔레비왕조를 창건했다. 우선 그는 스스로 아랍의 통치자라고 칭하는 카잘족장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특히 코람샤와 아와즈의 통제권을 박탈해 이란 중앙정부에 귀속시켰다. 그 족장은 1925년 초에 체포돼 여생을 테헤란의 한 구석에서 가택연금상태로 보냈다.

레자 칸은 회사이익에 도움이 되는 보안과 질서를 확립했다. 정부권력으로 노동조합결성과 요구조건 표명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1929년 남부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노동자의 생활조건은 아주 열악해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석유산업에 종사하는 고용 인구는 총 3만명이었는데 이중 6000명이 영국인이었다. 이란정부는 강제로 파업을 종식시키고, 약 200여명의 주동자와 선동자를 체포했다.

이들 중 얼마는 레자 샤의 절정기까지 투옥시켰다. 레자 칸은 즉위 후 일년 간 석유문제에 온 신경을 쏟았다. 그의 야심 찬 계획인 국토 횡단 철도와 군대혁신을 추진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란정부는 석유 분쟁을 당초 중재재판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회사는 협상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달시석유광구계약해지와 신 광구계약체결

실세인 법무장관 타이모르타시(Abdol Hossein Khan Teymourtsh)가 회사와의 협상자로 지명됐다. 이란정부의 요구사항은 회사주식의 25%를 소유할 수 있는 기반 마련, 톤당 석유생산량 2실링의 로열티, 광구면적의 3/4을 이란에 반환, 이란세법에 따라 납세, 광구계약이 끝나도 모든 회사사업에 대해 이란의 권리 인정 등의 내용이었다. 이상의 제반 조건이 수락되면 이란정부는 향후 20년의 계약연장을 허용키로 한 것이다.

협상은 1931년까지 지속됐다. 같은 해 이란의 석유수입은 30만 파운드로 전년도 128만파운드의 1/4 수준으로 급감했다. 회사는 감소 원인을 세계적인 경기침체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레자 샤는 지지부진 길어지는 협상과 이리 저리 핑계만 대는 회사에 대한 불만이 고조돼 마침내 감정이 폭발하기에 이른다.

그는 석유서류 뭉치를 난로에 집어 던지며 장관에게 당장 달시광구계약을 폐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달시광구의 계약해지 사실은 회사에 통보됐고, 이란국회도 이를 승인했다. 영국정부는 이란이 취한 일방적인 조치에 대해 강력한 어조로 반대를 표명했다.

영국은 수 척의 군함을 페르시아만에 파견하고 국제연맹(현 UN의 전신)에 제소했다. 그러나 안전보장 이사회는 협상을 통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라고 양측에 권고했다. 이란 측 대표와 회사측 대표가 유럽에 모여 첫 회담이 개최됐고 그 후부터 1933년 4월 24일까지 테헤란에서 회담이 열렸다.

양 측은 달시광구계약의 기 연장을 제외하고 그 밖의 문제에 관해서는 원칙적인 합의를 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30년 연장을 계속 주장했다. 결국 샤 자신이 직접 개입, 광구연장을 포함해 새 계약조건을 합의했다. 즉, 광구면적은 50만에서 10만 평방마일로 축소하고, 배럴당 4실링의 로열티를 내며, 4%의 세금 징수, 계약기간은 60년 연장해 1993년까지 등이 그것이었다. 당시의 석유 수요 격감, 경기침체 등을 감안하더라도 레자 샤가 왜 이런 계약을 했는지 의문점이 남는다.

2차 세계대전과 석유

2차 세계대전은 석유의 중요성을 더욱더 확실하게 입증해줬다. 중동, 극동 및 유럽에서 연합군은 연료공급을 주로 아바단 정유공장에 의존했다. 1944년 소련은 외무장관을 테헤란에 보내 석유광구를 얻으려 했다. 이란정부는 광구분양을 종전 후로 미루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소련은 격노했다. 이란 공산당은 반정부시위를 벌였고 전국에 걸쳐 집회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모하메드 모사데크박사(Dr. Mohammed Mosaddegh)와 반 광구계약법

그러는 동안 모사데크는 반석유법을 국회에 상정해 1944년 12월 4일에 통과시켰다. 2차 대전은 1945년 5월에 끝났으며 연합군은 6개월 시한으로 이란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란정부에 유감을 가진 소련은 이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란 수상 가반과 소련대사 사드치코프 합의서에 의해 소련군대는 이란에서 철수했다.

석유국유화

제16대 국회위원 선거운동, 1949년 2월 레자 샤 암살시도, 아야톨라 카샤니의 추방, 1950년 11월 이란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의한 법무장관 암살, 이란국민전선의 테헤란진출, 아야톨라 카샤니의 복귀 등 일련의 정치적 사태 속에서 석유문제에 관한 논란은 한층 더 고조됐다.

이란정부와 회사 간의 협상결과에 따른 가스-골드사이안 합의서(Gass-Goldhsyan Agreement)가 14대 국회 마지막 날 상정됐다. 그간 별 진전이 없다가 16대 국회에서 이 사안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합의서는 이란 정부의 로열티수입 증가를 가져 올 뿐, 주요 목적인 이란국민의 권리를 찾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때 여타의 산유국과 석유회사간의 수익 분배율은 50:50이 표준이었다. 이 합의서는 1933년에 맺은 새 계약을 보완하기 위한 보조계약으로 내 놓았으나 여타 산유국의 계약조건보다 아주 불리한 것이었다.

석유국유화 법안과 모사데크 정부

군 출신이며, 보조계약을 옹호하던 라즈마라수상은 암살되고 그 뒤를 이어 호사인 알라 수상이 내각구성의 임무를 맡아 코제스탄(Khozestan: 이란 서남부, 이라크와 페르시아만을 경계로 한 주)에서 노동자 파업의 여파로 인해 수상이 됐다. 알라 수상은 1951년 4월에 사임했고, 모사데크 박사가 국회 신임투표로 큰 지지를 얻어 수상 직에 올랐다. 1951년 4월 29일 석유특별위원회가 작성한 석유국유화 법이 입법기관에서 승인됐고 4월 30일 샤의 승인을 받아 다음날 모사데크 내각은 국유화 계획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유화 절차의 첫 단계로 이란 국영석유회사가 3명의 이사로 임시 이사회를 구성해 설립됐다. 1951년 6월 9일 이사진은 아바단에 도착했고, 그 다음날 코람샤 회사 본관 사무실 지붕위에 이란국기가 계양돼 펄럭거렸다.

이사회는 이란석유수출을 중단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유조선은 계속해서 석유를 선적하고 그 대신 영수증에 서명해 차후에 결정되는 조건에 따라 정산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조선은 회사 소유이거나 임차한 것으로 백지 영수증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서 아바단에서 석유 선적이 중지돼 아바단의 저유탱크는 넘쳐흘렀고, 정유공장 가동은 중단됐다. 그리고 4500여명의 외국 사람들이 집단으로 사표를 냈다. 당시 회사는 6만1500명의 이란인과 외국인을 고용했는데 정유 사업의 중단으로 수입이 없어 노임 체불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란 정부는 노임 지불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패한 석유문제의 해결책

1951년 6월 10일 임시 이사회가 코람샤에 주재하고 있을 때 회사의 부회장 바실 잭슨(Basil Jackson)을 수석으로 한 사절단이 제안서를 가지고 이란에 도착했다. 이 제안서는 국유화법과 상반돼 거절당했다. 영국정부는 헤이그 중재재판소에 불만내용을 제소했다. 이 재판소는 3개의 잠정조치를 내렸다. 그 조치 내용은 석유시설은 운영을 계속하고 이란정부는 회사 일에 간섭하지 말 것, 이 문제를 본 법정이 검토해 확정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이란 정부가 협조할 것 등이다. 이란은 이 소송사건에 대한 재판소의 재판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잠정조치를 거부했다.

잭슨사절단의 실패 후 미국 트루먼대통령은 이 사태를 수습하려고 수석참모 해리만을 테헤란에 파견했다. 이와 동시에 영국에서도 스토케 장관을 수석으로 하는 또 다른 사절단이 테헤란에 도착했다. 협상은 계속됐으나 역시 실패해 두 사절단은 모두 테헤란을 떠났다. 영국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유전과 정유공장을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해 사이프러스에 공정대를 파견했고 아바단 수역에 수척의 군함을 배치했다. 하지만 소련의 사태개입을 불안해하는 미국의 반대로 군사작전은 중단됐다.

1952년 7월 반란

날로 격심해지는 사회적 불안 때문에 대중에게 외면당한 가밤수상은 1952년 7월 21일 강제 사직 당하고 후임으로 모사데크 박사가 재임명돼 전 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갖게 됐다. 이 사태 한달 후 석유문제 해결을 위한 처칠과 트루먼의 공동제안서가 제의됐으나 석유국유화 원칙에 저촉된다며 채택되지 않았다. 외교적 명분을 내세워 자행되는 영국의 대규모 스파이작전에 대항하고자 모사데크 수상은 영국과의 외교 관계 중단을 선언했다.

1953년 8월 19일 쿠데타

이란 주재 미대사는 1953년 6월 25일로 예정된 CIA 관료회의에 참석차 1953년 5월 30일 테헤란을 떠나 워싱턴으로 향했다. 미 국무장관 덜래스와 대통령 아젠하워는 모사데크 축출 쿠데타계획을 승하고 그 실행 지시 명령까지 내렸다. 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의 CIA 책임자인 크레디트 루스벨트(Credit Roosevelt)는 쿠데타 지휘 차 위조여권을 가지고 이라크를 거쳐 이란에 잠입했다.

샤의 법령에 근거해 파즈롤라 쟈헤디(Fazlollah Zahedi)장군이 수상으로 지명됐다. 쿠데타의 주동자는 한 밤중에 여러 명의 장관을 체포했다. 나시리(Brigadier Nassiri) 준장은 모사데크에게 해임을 통보하려고 군 트럭과 장갑차의 호송을 받으며 관저로 향했다. 그러나 이 쿠데타 음모를 사전에 포착한 모사데크는 이들에게 반격을 가하고 나시리 준장을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8월 16일 이른 아침 뉴스에서 이번 쿠데타는 실패했다고 선포됐다. 샤는 개인비행기를 타고 급히 바그다드로 피신했다. 그러나 쿠데타 작전은 8월 16일 재차 보다 강력하게 전개돼 정부청사를 접수하고 여당 본부와 친정부 신문사를 불태우고 방송국을 점령했다.

신임 수상의 메시지가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고, 쿠데타의 행동대는 모사데크 주택을 기관총과 탱크로 사격을 가하면서 기습했다. 모사데크는 친구들과 옆집으로 피신했다가 군사령관에게 항복했다. 재판의 여지도 없이 즉각 아마다바드로 추방돼 그곳에서 죽었다.(1967년 3월 5일 84세)

모사데크는 1940년대 이란의 정치가이며 국회의원을 지냈다. 기존 정당에 가입하지 않고 국민전선을 결성해 많은 호응을 받아 전국적으로 팽창했다. 그리고 외국인에 의해 관리되는 국가의 주요한 자원인 석유의 관리권은 이란정부의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이란 석유국유화의 주동자가 됐다.

그는 이란을 위해 정치가로서 항상 3가지 노선을 견지했다. 그 내용인즉 이란은 외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독재군주제가 아니라 민주군주제로 남아야 하고 사회개혁 등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선 외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야 다른 두 가지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AIOC가 이란의 석유자원을 관할하는 한 외국 간섭이 불가피하니 조속히 석유국유화를 단행하게 됐던 것이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1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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