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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국운(I)

리비아의 국운(I)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1.08.0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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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리비아는 동쪽에 이집트, 서쪽에 튀니지와 알제리, 남쪽에 수단, 차드, 니제르, 북쪽은 지중해에 접해 있다. 면적은 남한의 18배인데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90%)이고 지중해 연안과 내륙 고지대의 경작지로 되어 있다.

인구는 659만 명이며, 수도 트리폴리에 109만 명이 거주하며, 97%가 수니파이다. 국민소득은 구매력평형가격(Purchasing Power Parity: PPP)기준 905억 달러로 세계 74위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1만4000달러 세계 83위이다. 석유매장량은 410억 배럴 아프리카 1위이며, 생산량은 하루 160만 배럴 세계 17위다. 석유수출 대상국은 이태리 32%, 독일 14%, 프랑스와 중국이 각각 10%, 미국 5% 등 주로 유럽에 수출을 하고 있다. 리비아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리비아 석유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리비아의 역사는 북아프리카 토착민 베르베르 부족과 여러 소수부족이 합쳐져서 이루어졌다. 이 베르베르 부족은 전 역사를 통해 주된 역할을 했고, 리비아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리비아는 내세울만한 역사적 사실은 없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국세력 즉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 외세의 지배를 받아온 식민지역사에 불과하다. 현대 리비아는 1951년에 탄생됐으며, 그 역사는 고대 리비아, 로마시대, 이슬람시대, 오스만시대, 이태리시대, 현대 등 여섯 시대로 구분된다.

고대 리비아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기원전 8천년 경부터 역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신석기시대에 모든 지중해연안이 그러하듯 리비아연안 평원에서도 소를 가축으로 길들이고, 곡식을 재배했다. 그리고 남쪽 사하라사막에서는 유목민이 초원을 찾아 멀리까지 돌아다녔다. 기원전 2000년까지 번성했으나 베르베르족의 침입으로 대 초원의 유목민은 현재 수단지역으로 내려가거나 베르베르족에 흡수됐다.

베르베르족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그들의 조상은 고고학과 언어학으로 볼 때 서남아시아로부터 기원전 3천 년에 북아프리카로 이동해 왔다고 추정된다. 그들은 활동범위를 이집트에서 니제르 지역까지 넓혔다. 그들은 국가를 거의 세우지 않았고 그들의 정체성은 부족 중심 또는 부족왕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견된 고대 이집트왕국 시대 (2700~2200 BC) 기록문서에 보면 베르베르족의 이주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 문서는 가장 오래된 리비아의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중대 이집트왕국 시대(2200~1700 BC)에는 베르베르족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강요했다. 이들은 주로 파라호의 군인으로 복무했다. 기원전 50년에는 베르베르족의 한장군이 이집트 권력을 잡아 파라호가 되어 후계자로 이어져 상당한 기간을 통치했다. (945~730 BC) 이 시기를 이집트의 리비아 왕국이라 한다.

로마 리비아

기원전 7세기경 페니키아는 리비아 동부에 있는 키레네이카를, 희랍은 서부의 트리폴리타니아를 각각 식민지화했다. 로마는 기원전 106년에 트리폴리타니아(현재 트리폴리와 그 인근지역)을 정복했다. 희랍의 마지막 통치자 프토레미 아피온(Ptolemy Apion)이 키레네이카를 로마에게 넘겨주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74년에 로마의 속주(屬州)로 합병됐다. 기원전 64년에 시저의 로마군단이 점령계획을 수립 침공해 리비아의 3지역(트리폴리타니아, 키레네이카, 페잔)을 모두 통일시켰다.

리비아는 로마의 속주(屬州)로서 번창했다. 2세기경에는 황금기를 이루어 레프티스 마그나시(Leptis Magna City, 사진#1 참조)는 카르타고나 알렉산드리아와 그 뛰어남을 견줄만했다. 400년이 넘게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네이카는 로마의 부유한 주(州)였으며, 도시국가로서 언어, 법률제도 등을 공유했고, 이 곳 시민은 로마인의 신분을 가졌다. 레프티스 마그나와 같은 로마의 폐허는 현재 리비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공개토론장, 시장시설, 위락시설, 목욕탕 등이 이 지역 곳곳에 있어 인구가 많은 도시는 물론 작은 마을 주민들도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로마제국 각지에서 상인과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리비아 연안지역은 로마화 됐다. 그러나 트리폴리타니아의 도시는 카르타고 풍이 잔존해 있었고, 키레네이카 도시는 희랍 풍이 남아 있었다. 지배적인 종교는 기독교였으나, 키레네이카에는 대규모의 유대인 사회도 구성되어 있었다. 트리폴리타니아는 주로 올리브유, 금, 노예 등을 수출했고, 키레네이카는 포도주, 약제, 말 등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 레프티스 마그나시에 있는 이 곳 출신 로마황제(Septimius Severus) 아치.
300년 로마황제는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크래타섬을 키레네키아로부터 분리하고, 위쪽 리비아와 아래쪽 리비아로 행정구역을 양분했다. 이 때 처음으로 리비아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395년 동서로마로 나누이면서, 키래네이카는 동로마제국으로, 트리폴리타니아는 서로마제국으로 편입됐다.

이슬람시대

647년 압둘라 사드 (3대 칼리프 우타만 아판의 형제)는 4만명의 아랍군대를 이끌고 비잔틴(Byzantine Empire: 동로마제국)을 공격해 리비아를 점령했다. 비잔틴으로부터 트리폴리를 빼앗고, 차례로 카르타고에서 240km 떨어진 수페툴라시를 점령했다. 아랍 군대는 계속해서 진격했고, 비잔틴은 이를 저지하려고 군대를 파견했으나 패해 되돌아갔다. 이를 기회로 아랍제국은 북아프리카에 이슬람교세를 그게 확장했다. 그 후 베르베르 부족은 이 시기에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아랍이 철수한 후에도 계속 이슬람교도로 남았다.

750년 이슬람 아바시드왕가는 움아야드 왕가를 몰아내고 3번째 칼리프 왕조를 세워 수도를 바그다드에 두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리비아 연안의 통치는 그곳의 족장에게 위임했다. 800년 아가라비드 족장은 바그다드 칼리프 왕국의 간섭을 벗어나 에미르왕국 (Emir Dynasty)을 설립했다. 이 족장은 리비아의 번영을 위해 로마관개시설, 질서유지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왕국의 번영은 정치와 경제가 쇠퇴해지고, 베드윈 히라리엔이 침입해(1050~1052년) 끝이 났다. 북부 이집트 유목민 베드윈은 나일강 상류로부터 초원을 찾아 서쪽 리비아로 대거 이동했다. 이들은 메뚜기떼같이 리비아의 정원과 초원을 마구 휩쓸고 다녔다. 이 침략을 베드윈의 지도자인 바누 히랄(Banu Hilal)의 이름을 따서 히라리엔 침공이라고도 한다.

오토만시대(1551~1911)

16세기 초 리비아 연안에는 아랍 칼리프의 힘이 미치지 않게 되자 여러 항구는 해적들의 천국이 됐다. 스페인은 이를 틈타 1510년 트리폴리를 점령했으나 식민지 통치보다는 그들이 필요한 항구관리만 했다. 1538년 트리폴리는 또다시 그 유명한 해적왕 바바로사(이태리어로 붉은 수염, 본명은 Khair ad-Din)가 점령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바르배리연안(Barbary Coast ; 북아프리카 서부연안 지역)이라고 불렀다. 이 어원은 베르베르에서 유래됐고, 해적들은 지중해와 북대서양에서 상선을 습격해 탈취한 상품과 아프리카 노예를 유럽이나 미국 상인에게 팔았다.

1551년 오스만제국은 트리폴리를 점령하고 보니, 해적들을 소탕하기 보다는 해적 노획물을 거래하는 것이 유익함으로 해적을 종전대로 방치했다. 이런 해적들의 세상은 2세기가 넘도록 계속됐다.

오스만 통치하에서는 머그레브지역(Maghreb, 북아프리카 서부지역: 모로코, 서부 사하라, 알제, 튀니스, 리비아, 모리타니아)을 알제리, 트리폴리, 튀니스 등 3개 주로 나누었다. 1565년 이후부터 행정당국의 최고책임자 파샤(Pasha : 총독, 장군 등 고위직의 터키식명칭)는 콘스탄티노플 주재 술탄이 임명했다. 술탄은 파샤에게 터키 근위보병(Janissaries)군단을 내주었다. 이 군단은 몇 개의 소 부대로 나누어 초급장교가 지휘했다. 이 부대는 오스만 치하의 리비아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1711년 오스만의 기병대 장교 출신 아매드 카라만리(Ahmed Karanli)는 오스만의 트리폴리타니아 총독을 살해하고, 권력을 잡아 카라만리 왕조를 세웠으며 이 왕조는 124년간(1711-18350)이나 지속됐다. 이 기간 중 리비아는 내전(1791~1795년)을 치렀다.

▲ 1차 바르배리 전쟁.
1801년 5월 유스프 카라만리(Yusuf Karamanli)는 1796년 이래 미국 상선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대가로 받던 금액의 인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절하고 해군을 파견해 트리폴리를 봉쇄했고, 이로 인한 1차 바르배리전쟁이 1805년 3월까지 이어졌다. 1815년 2차 바르배리전쟁이 일어났다. 오스만의 섭정을 받던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 등 3지역을 통틀어 바르배리 국가라고 했다. 미국과 바르배리 간의 국제분쟁은 영국과 화란에 의하여 1815년에 종식됐다. 그 후 미국은 상선보호금을 지불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막강한 선박을 건조하여 해적을 섬멸했다.

1814년 쇠퇴 일로에 있는 오스만제국의 술탄 마무드는 바르배리국의 직접적인 권한을 거듭 주장하는 혼란을 잘 이용했다. 이 권한의 이양은 오스만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유지됐다. 오스만 권력이 분산됨에 따라 트리폴리는 물론 이집트는 사실상 독립을 한 상태이고, 사하라 사막과 지중해 연안은 무정부상태였다. 그 후 오스만이 권한을 찾아 직접 통치하는데도 무정부 상태는 지속됐다. 오스만 터키는 75년간 33명의 총독을 보냈고, 리비아가 자치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제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1911년 이태리가 침공하여 이태리-터키전쟁이 일어나 오스만제국은 쇠퇴가 시작됐다.

이태리-터키 전쟁과 이태리 리비아

1911년 10월 3일 이태리는 리비아를 오스만치하에서 해방시킨다는 가식적인 명분하에 트리폴리를 공격했다. 오스만 술탄은 리비아 사람들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1912년 로잔느조약을 체결하고 리비아를 이태에게 양도했다. 오스만 군대가 철수하자 이태리는 1913년 1년 동안에 쉽게 동 트리폴리타니아, 가다메스(Gadames : 알제와 튀니스 서부 국경지역의 오아시스), 무르죽(Murzuk, 페잔의 수도)을 점령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태리군대는 본국으로 귀환, 오스만은 성전을 선포, 트리폴리타니아와 페잔의 리비아인들은 봉기, 키레네이카인들의 빨치산 활동 등의 사태를 감당하지 못해 이태리는 점령한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트리폴리, 데르나, 키레네이카 연안에 꼼짝없이 갇히게 됐다.

이태리는 1922년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리비아 식민지화 작업이 치열해졌다. 키레네이카의 족장 이드리스(Shiek Sidi Idris, 후에 리비아 왕이됨.)은 이집트로 피신했다. 그라지아니원수(Marshal Gragiani)는 무솔리니로 부터 이태리법, 국제법 등 어떠한 법적 제한도 받지 않는 처벌권을 위임 받아 리비아 레지스탕스를 극심하게 압박했다. 리비아인도 계속해서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저항했으며 키레네이카의 오말 무크타르(Omar Mukhtar)가 주모자였다. 1928년 3월 이태리는 불완전한 휴전을 하고 나서 오히려 국외추방, 투옥 등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했다. 1931년 9월 주모자 무크탈가 체포돼 뱅가지에서 교수형에 처해지자 반항세력은 소멸되고, 이드리 족장 주변 인물들에 의한 반란만이 간간이 일어났다.

1934년에 이르러서야 리비아는 평화를 되찾았다. 이태리 신임총독 이타로 발보(Italo Balbo)는 이태리인과 아랍인간에 융합정책을 시행했다. 1939년 무슬림이 이태리 국가파시스트당에 입당을 허락하는 법률이 제정됐고, 이태리 군부 내에 리비아 군대결성도 허락했다. 그 결과 이태리는 2차 세계대전 때 이래리 군적(軍籍)에 올라 있는 많은 무슬림들의 도움을 받았다.

총독 발보는 1934년부터 1940년까지 많은 인프라(도로 4000km, 철도 400km, 농촌마을 건설 등)를 구축해 이태리-리비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리비아경제는 붐이 일어났으며 특히 농업부분이 우세했다. 또한 공장가동도 활발했는데 대부분 식품가공공장이었다. 많은 건물이 들어섰고, 특히 현대식 병원이 처음으로 설립돼 건강 및 위생조건이 개선됐다. 이 밖에 신규사업으로 화약, 철도, 피아트자동차, 농기구, 시멘트, 제철 등의 산업도 시작됐다. 발보 총독은 이태인을 위한 새로운 마을을 지중해 연안을 따라 건설해 이태리마을을 구축하고, 아랍인을 위한 마을도 아울러 건설해 리비아 식민지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1940년 리비아의 총 인구는 91만 5000명이며 이 가운데 이태리인이 11만 1000명으로 12%나 점유하게 됐다.

2차 대전 종전과 독립의 태동

30년 지속되던 이태리-리비아는 1943년 2월 연합군이 서부 트리폴리타니아를 점령함으로써 끝이 났다. 그러나 리비아의 공식적인 반환은 1947년 전후 평화조약 합의에 따라 이루어졌다.

전후 초기에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네이카는 영국이, 페젠은 불란서가 각각 관리했다. 1944년족장 이드리는 망명지인 카이로에서 돌아왔으나 반항운동은 하지 않았다. 1947년 평화 조약 협의시 이태리는 트리폴리타니아를 요구하고, 프랑스는 페잔을 원했으나 합의가 안되어 결국 리비아는 국토가 분열 되지 않고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다.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를 해방시키자 극심한 반 유태인 폭동이 일어났다. 1945년 11월 5~7까지 트리폴리에서 아동 36명을 포함한 유태인 140명이 학살되고, 수 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트리폴리의 5개의 유대교 회당과 지방의 마을이 파괴되고, 트리폴리에서만 1천여 유대인 가택과 많은 상업건물들이 약탈당했다. 1948년 6월 2차 반 유대인 폭동이 일어나 12명이 죽고, 유대인 집이 28채나 파괴됐다. 반 유대인 공격이 공포를 자아내고 불안을 조성하게 되자 수 많은 유대인이 리비아를 떠나야만 했다. 1948~1951년 사이 3만명 이상 떠났고, 나머지 리비아 유대인 약 7000명은 1970년까지 이태리로 탈출했다.

1949년 11월 21일 유엔 총회는 리비아를 1952년 1월 1일 이전에 독립시킨다는 결의문을 통과 시켰다. 그 후 유엔 협의에 리비아 대표로 이드리스가 참석했다. 유엔은 독립 과도기의 리비아를 감독 관찰했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 자매지인 월간 <CEO ENERGY> 2011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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