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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국운(Ⅱ)

리비아의 국운(Ⅱ)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1.09.0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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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독립

리비아는 2차 대전 후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 군대를 몰아내기 전까지 이탈리아 식민지였다. 1947년 이태리가 리비아에 대한 권한을 공식적으로 포기함에 따라 유엔이 신탁통치를 하게 된바 영국은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내이카를, 프랑스는 페잔을 각각 통치했다. 1949년 11월 21일 유엔 총회는 1952년 1월 전에 리비아를 독립시킨다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리비아 왕국(1951~1969)

▲ 이드리스(Idris as-Senussi) 에밀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내이카의 통치자인 이드리스(Idris as-Senussi) 에밀은 유엔 리비아 대표로 나섰으며, 1951년 12월 24일 세 지역(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내이카, 페잔)의 대표들과 함께 리비아 연방 왕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왕이 됐다. 이 새 국가는 3개의 주 자치정부를 가진 연방정부가 됐으며, 3개 주는 트리포리, 벤가지, 알 베이다 등 3개의 도시에 각각 수도를 두었다. 리비아는 독립 2년 후 아랍연맹(Arab League)에 가입했다.

리비아는 1951년 12월 24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유엔을 통해 독립된 최초의 국가이며, 또 유럽열강이 점령한 아프리카국가 중 처음으로 독립을 한 국가가 됐다. 리비아는 입헌군주국임을 선포하고, 이드리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소련은 2차 대전이 끝나자 리비아를 위임통치 할 것을 주장했었다.

막상 독립은 했으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학은 하나도 없었으며, 대학 졸업자는 단지 16명에 불과했다. 나라 안을 통틀어 3명의 변호사 밖에 없으며 리비아 출신 의사, 엔지니어, 측량기사, 약제사는 전무했다. 단지 25만명만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인구의 5%가 장님이었고, 트라코마 눈병이 만연했다. 이러한 처지를 잘 아는 영국은 여러 명의 간부급 공무원을 리비아에 파견했다.

1955년 4월에 석유탐사가 시작돼 4년 후인 1959년에 유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1963년에 원유가 최초로 수출돼 리비아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리비아도 역시 자원의 저주를 면치 못했다. 석유는 세계에서 아주 가난하던 리비아의 재정상태를 현저하게 개선시켰으며, 엄청난 부를 축척하게 됐다. 하지만 이러한 부는 이드리스와 몇 몇의 수중으로만 들어가게 되어 대중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이러한 불만은 낫셀주의와 아랍국민주의와 맞물리고 미국인, 이태리인, 영국인들이 계속 드나 들면서 더욱 고조되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은 엔지니어링에 주관하면서 제일 큰 무기공급자가 됐고, 미국은 리비아에 큰 윌어스 공군기지(Wheelus Air Base)를 개설했다.

1963년 4월 25일 연방제도를 폐지하고 국호를 리비아왕국으로 하는 개헌을 했다. 전후 처음으로 태어난 리비아국가로서 리비아 시민의 권한을 문서화하는 헌법 제정만큼 이번 일처럼 중차대한 일을 없었을 것이다. 리비아정부는 유럽과 북미 국가에서는 통상의 권리로 간주되는 조항들에 대하여 예민했다. 비종교적 국가를 택하지 않고, 제5조에 이슬람국가임을 선포했다. 리비아 헌법은 형식적으로는 종교, 종족, 언어, 부, 정치 및 사회적 의견 등과는 관계없이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하고 동등한 기회를 가지며, 또한 동등한 의무와 책임을 진다고 11조에 명기됐다

아프리카 여타 독립국가와 마찬가지로 귀국하지 않고 리비아에 눌러 앉은 이태리사람들이 좋은 직업을 차지하고, 비옥한 농토를 보유하는 등 식민지 후광으로 추진한 사업 다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1969~2010)

1969년 9월 1일 27세 군장교인 무암마르 카다피(Muammar Gaddfi) 지휘하에 소규모 장교 집단이 이드리스 왕에 대항해 쿠데타를 획책하고 혁명에 착수했다. 카다피는 그 후부터 정부성명이나 신문에서 혁명의 선도자이며 지도자라고 불려졌다.

1973년 예언자 모하메드 탄신 일에 카다피는 5가지에 관한 사항을 발표했다. 그는 기존의 모든 법령과 샤리아(Sharia: 이슬람법)의 실행은 중지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정치적으로 병들어 있는 나라를 정화해야 하며, 국민의 군대는 혁명을 보호해야 하며, 행정혁신과 문화혁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카다피는 광범위한 감시체계를 수립하고 정부, 공장, 교육분야에서 주요 감시가 행해졌다. 혁명위원회를 위한 감시원은 리비아사람의 10~20%에 달했다. 카다피는 반체제 인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을 했으며, 국영 텔레비전에서는 현장중계 방송도 하였다. 카다피는 자신의 개인 정보원을 고용해 전세계에 퍼져있는 요주의 리비아 피난민을 암살하려고 자객을 모집했다. 국제인권보호단체(Amnesty International)가 작성한 명부에 1980~1987까지 25명 이상이 살해됐다고 기재됐다.

1977년 리비아는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국가(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임을 선언했다. 카다피는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려는데 반대하며 이집트에 대포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사다트 군대는 리비아-이집트 전쟁으로 알려진 국경전투에서 나흘 만에 쉽게 승전했다. 리비아 400명 이상 죽었으며, 카다피의 기갑사단은 망신창이가 됐다.

1977년 2월 리비아는 북부 차드의 인민무장세력에 군수품을 대주기 시작해 차드-리비아간의 분쟁이 야기돼 침공으로까지 확대됐다. 카다피는 친구인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구하려고 탄자니아와의 전쟁에서 수 백 명의 리비아인을 희생시켰다. 카다피는 반핵운동으로부터 호주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집단에 재정지원을 했다. 그러나 카다피의 경제이론 하에서 동부 리비아의 경제는 피폐해졌다.

1970년대 유가 상승으로 인하여 국가의 재정상태는 상당히 증가됐으나 이를 무기 수입과 세계 여러 곳의 수많은 무력 집단(준 군대조직)과 테러 집단을 후원하는데 소비했다. 1986년 카다피를 사살하려는 공습은 실패했다. 리비아는 민항기를 추락시켜 수 백 명의 여행객이 희생됨에 따라 유엔은 결국 경제제재를 단행했다.

카다피는 아프리카 합중국을 세우려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2008년 경칭하는 뜻에서 아프리카의 왕 중 왕이라 일컬었다. 2010년 초에는 아프리카 연합(54개국)의 리더가 되려고 시도했고, 전 침략자인 이태리와 유대를 강화하고, 유럽연합(EU) 국가들에게도 접근했다.

▲ 2011년 3월초. 과도 국가위원회가 장악한 지역(갈색)과 카다피 통제지역(녹색), 교전중인지역(파란색)
2011년 내전과 연합군의 개입(2011. 2.17~8.23)

민중운동이 튀니지와 이집트의 독재자를 타도한 것을 보고, 동서국경에 인접한 리비아에서도 2월 17일 전면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3일 후인 2월 20일 반군은 제2도시 벵가지를 장악했고, 이로 인해 트리폴리에서도 불안이 고조됐다. 2월 21일 이른 아침 카다피의 둘째 아들이며 제2인자인 사이프(Saif al-Islam Muammar Al-Gaddafi)는 TV방송에서 만일 폭동이 전국에서 휘몰아치게 되면 나라는 산산조각이나 15명의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수장국으로 된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국가경제와 최근의 번영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경고하며, 폭동진압 과정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헌법제정을 2월 23일에 시작한다고 했다. 이 연설 후 얼마 안되어 주 인도 리비아 대사는 시위자 대량 학살에 대한 항의로 BBC 방송을 통하여 사의를 표명했다.

카다피는 국영 TV방송에 나타나 리비아를 떠나 피신하였다는 영국 외무장관이 거론한 소문을 일축했다. 카다피는 “나는 베네수엘라가 아니라 트리폴리에 건재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길 잃은 개 같은 TV방송을 믿지 말라고 덧붙였다. 영국정부는 최근 폭동을 서구와 이스라엘 구미에 맞게 묘사했으며, 신문과 TV를 통하여 계획적으로 리비아 뉴스매체의 내용을 교묘히 조작 발표했다. 리비아공군 2명의 대령이 반군에 무차별 폭격을 거부하고 미라지 F1D 타고 말타로 망명했다. 그러나 소련 군부는 반란군에 대한 공습을 증명할 수 없었다며 혼란이 시작된 이래 공습은 없었다고 했다.

3월 초에 이르러 반군에 대한 군부 지지와 연합군의 지원이 임박함에 따라 리비아의 많은 지역이 카다피 통제권을 벗어났다. 친 카다피 군 세력은 서부 리비아에서 군사적 대응으로 반란군을 밀어 내면서 전략적인 연안 도시 라스 라누프와 브레가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트리폴리에서 48km 떨어진 도시 쟈위야를 공습과 탱크 포격으로 분쟁 중 가장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는 가운데 친 카다피 군대가 점령했다. 동부 리비아 중심이며 제2의 도시 벵가지 항구는 반군의 수중에 있고, 트리폴리와 인근 도시는 분쟁 중에 있다.

그러나 카다피는 공개적으로 반항운동을 분쇄하겠다고 위협했다. 알자지라와 다른 매체의 보고에 의하면 트리폴리에서 정권에 대항하는 반동분자들과 배반자를 죽이기 위해 친 카다피 군대를 무장한다고 전했다. 유엔의 반기문 사무총장과 인권위원회는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탄압하는 처사를 비난했다. 특히 유엔 인권위원회는 전례 없는 탄압을 역설적으로 변명하는 리비아의 유엔 대표를 즉석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미국은 리비아에 경제 제재조치를 취하였고, 뒤이어 호주와 캐나다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카다피와 그의 정부관리를 국제형사재판소에 조사 회부했다.

2월 26일 반군대표기구인 과도국가위원회(TNC: Transitional National Council)가 반군치하에 들어온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려고 카다피 정부의 전 법무장관(Mustafa Abdul Jalil)의 관리하에 결성됐다. TNC는 카다피 정권에 맞서는 광범위 조직으로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됐다. TNC가 현재 벵가지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트리폴리를 수도로 내세우고 있다. 인권변호사 고가가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 3월 10일 카다피는 브레가와 자위야를 재 탈환했고, 프랑스는 처음으로 TNC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했다.

3월 1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비행금지구역설정과 리비아 내에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얼마 후 리비아 외무장관은 리비아는 즉시 총격을 멈추고, 모든 군사작전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성명에도 불구하고 친 카다피 군은 반란군의 근거지를 계속해서 공격을 했다.

▲ 미라지 F1
3월 19일
프랑스 전투기가 적의 목표물을 탐지를 위한 정찰비행임무를 띠고 리비아 영공을 비행하였는데 이것으로 연합군의 첫 군사작전이 개시됐다. 연합군의 군사행동은 정전을 유도하려고 불란서 전투기를 투입 리비아 지상군 차량을 공격하였으나 카다피의 반응은 없었다. 또 프랑스 전투기는 5대의 카다피 군 탱크를 격파했다. 미국과 영국은 토마호크 미사일을 사용해 20개가 넘는 리비아 대공 방어망 체제를 공격했다.

5월 15일 항구 도시 미스라타를 카다피 군대가 수개월간 포위하고, 박격포 공세를 퍼부었다. 수 백 명의 시민과 반군이 희생됐으며, 식량, 물, 전기 등의 부족으로 끔직한 생활을 했고, 특히 의약품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나토의 공습이 4월 말부터 시작되어 카다피의 탱크와 대포를 공습했고, 반군도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작전으로 5월 11일 치열한 격전 후 미스라타의 카다피 포위군을 철수시켰다.

6월 27일 국제형사재판소는 카다피가 민간인, 시위자, 반체제 인사 등에 대한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공격 계획과 그 시행계획에 관여했다는 혐의가 인정되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7월 28일 반군은 서부 산악지대의 도시들을 점차적으로 점령 진격하면서 카다피군을 밀어내고 많은 군수품도 확보했다. 이 작전은 트리폴리를 봉쇄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8월 15일 내전은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은 형국이다. 반군은 트리폴리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가얀도시를 점령했다. 이로서 트리폴리로 통하는 모든 주요 도로를 반군이 장악하게 됐다.

▲ 3월 19일 프랑스 전투기가 조각 낸 카다피 군대 탱크.
8월 22일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 의장은 트리폴리에서 산발적인 교전이 계속되고 있지만 카다피 시대의 종료를 공표했다. 도시 대부분을 장악한 반군의 급습에 대비하려고 카다피의 최후 보루인 밥 알 아지지야에서 탱크가 이동하면서 도시 일부에서 전투가 계속됐다. 시내 중심부의 거리에서 반군 지지자들이 축제에 들떠있으나 고립된 친 카다피군의 저격수, 포격 등에 의한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일부 카다피군은 반격을 준비하고 있으며, 반군 또한 카다피의 최후 보루인 밥 알 아지지야를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준비 중이다.

결사 항전을 외치던 카다피 대령은 간곳없고, 힘을 과시하던 아들들은 체포 투항했다. 6개월 187일만에 42년간의 철권통치, 그린북(Green Book)의 시대는 종지부를 찍으려는 순간에 와있어 리비아의 새로운 국운이 닦아 오고 있다.

이와 같은 6개월 만에 리비아 반군의 승리는 미국과 나토의 기여는 물론 카달를 포함한 주변국들의 기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8월 23일 NATO군과 반군은 마침내 카다피의 요새 밥 알 아지지야에 진입했으나 카다피는 찾아내지 못하고, 생포됐다는 차남 사이푸 알 이슬람이 외신 기자들이 머무는 직소스 호텔에 나타나 건재함을 과시했다. 따라서 반군지도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일찍이 카다피 시대의 종언을 공식 선포한 과도구가위원장도 카다피를 생포해야만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고 한발 물러 섰다. 지난 6개월 동안 여러 번의 반전이 있었으며, 내전의 종지부를 찍으려는 순간에도 40년 철권정치가 다 녹아 내린 촛불이 마지막으로 불꽃을 피우듯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다. 염려 했던 카다피의 고립된 군대와 친위대는 계속 저항하고 있다.

리비아의 국운

리비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으나 국민을 위한 국가를 탄생시키려면 그 길은 험난 할 것이다. 40년 독재 하에 이렇다 할 구심점 있는 정치세력은 전무하다. 최소 140여개, 최대 500여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부족국가다. 이중 3대 부족인 와르팔라, 주와야, 카다파가 리비아 전체 인구 642만명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내전으로 인하여 이들간의 세력균형이 깨지고 반목도 커졌다. 그리고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2차 대전 전에는 독립한 적이 없는 지중해 연안 강대국의 식민지에 불과했기 때문에 내세울만한 정체성을 리비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카다피 이후 첫 번째 도전은 보안이다. 공공 질서유지에 실패한다면 이라크와 같이 카다피의 잔당들이 시민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정부 건물을 파괴할 것이다. 지난달 반군의 내분으로 총사령관이 살해된바 있어 45개나 달하는 반군 민병대간에 살해행위가 일어 날 가능성이 있다. 식량, 물, 주택, 의료 등 취약지구에 우선 공급하고 트리폴리와 여타 도시의 시민에게 급수와 전력공급을 하는 것이 공공 질서 유지에 관건이 될 것이다.

리비아가 석유와 가스 수출을 재개하고, 과도기를 잘 넘길 수 있는 능력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게 되면 예멘, 시리아 등 아랍의 정의로운 항거에 큰 용기를 불어 넣을 것이다. 따라서 유럽과 아랍연맹은 리비아의 안정을 지원 유도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카다피 후 합법적인 리비아 지휘당국을 확정해 과도기를 위한 전략적 목표를 수립 추진함으로써 부족간의 갈등과 외세의 개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NATO군 또한 리비아 시민을 보호하는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리비아의 국운을 생각하면서, “리비아의 미래는 국민들의 손에 달렸다”라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말이 떠오른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1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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