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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나(Ⅰ)

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나(Ⅰ)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1.11.0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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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프라테스강.

이라크는 필자가 60여 년 전 초등학교시절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를 열심히 외우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잘 아시겠지만 이 지역의 양쪽으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수 천 년에 걸쳐서 그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아랑곳 하지 않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1994년 요르단의 암만을 거쳐 육로로 바그다드를 처음 방문할 때 사막 가운데를 10여 시간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갑자기 시퍼런 강줄기가 나타나 시원스레 흐른다. 이것이 바로 유프라테스강이고, 4시간을 더 달려가니 바그다드시내가 나타난다. 그 중심부에 티그리스강이 수량도 풍부하게 흐르고 있다. 그 후 이라크 유전을 확보하려고 서른 번이나 넘게 이곳을 지나다녔다.

문명의 발상지로서 산천은 의구한데 이라크인의 삶은 험악한 독재가 끝났어도 테러, 종족 및 종파의 분열로 고달프기 그지없다. 세계 강대국의 눈에는 고갈되어가는 석유만 보일 뿐 이라크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은 안중에 없다. 이라크의 역사를 보면 외세 침략으로 극심한 고통을 수없이 격어야만 했다. 페르시아, 알렉산더, 이슬람, 로마, 몽골, 터키, 영국, 미국 등이 이라크를 괴롭혔다. 이라크는 종파분쟁, 쿠르드 독립, 테러분자, 석유 분배 등 직면한 현안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강대국은 자국의 이권이 이라크의 문제와 결부될 때 거침없이 이라크를 내칠 것이다.

미국이 부시일가가 그랬듯이 지난 10월 22일 새벽 CNN 뉴스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3조달러 이상이나 들어간 이라크전비로 재정압박으로 연장하려던 4만 5000명의 미군을 험악해지는 이라크의 치안을 방치한 채 연내로 당초 계획대로 철수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라크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SOFA협정을 맺고 있어 의회의 동의없이 언제든지 파병이 가능하다. 미국은 비록 큰돈과 귀중한 생명을 잃었지만 향후 중동문제의 개입을 위한 군사적 거점을 확보한 셈이다.

현재 이라크 인구는 3039만 명이며, 종족은 아랍 75%, 쿠르드 20%, 터기, 아시리아 등이 5%로 구성되어 있다. 종파는 시아파가 65%, 수니파가 32%, 기독교가 3%이다. 국토면적은 43만7000㎢이고, 크기는 남한의 4.4배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3800달러지만 기아선 이하의 인구는 25% 760만 명에 달한다. 석유 매장량은 세계 5위 1150억 배럴이고, 일일 240만 배럴을 생산해 191만 배럴을 수출(세계 11위)한다.

이라크 역사의 흐름 개관

이라크공화국은 1958년 쿠데타가 일어나 1932년 독립한 파이잘 2세 왕정을 종식시키고 탄생됐다. 비록 현대국가로서 이라크공화국은 젊지만 이곳의 땅과 사람의 역사는 50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이라크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적지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최고의 문명지인 수메르가 탄생했다. 천년의 세월이 시대를 갈라놓았지만 이라크의 역사는 두 강의 범람과 간조에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따라 변하며 계속됐다. 즉 강의 범람을 방치하면 큰 홍수로 전 마을이 침수돼 모든 것이 파괴된 반면 제방, 수로, 뚝 등의 관개시설을 잘 정비 관리하면 땅은 비옥해져 곡물 수확이 크게 증대시켜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파괴와 생산의 양면성을 지닌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이라크 전 역사에 걸쳐 찾아볼 수 있는 두 가지 특별한 유산을 남겼다. 메소포타미아의 풍부한 수자원과 넓은 유역평야에서 잉여 농산물 생산이 가능했으며, 이로 인해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방 수메르가 문명의 발상지가 될 수 있었다. 또한 함무라비(1792~1750 B.C), 사이러스(550~530 B.C), 다리우스(520~485 B.C), 알렉산더(336~323 B.C), 아바시드(750~1258 A.D) 등과 같은 걸출한 통치자들에 의해 이 문명이 잘 보존됐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바빌론, 아시리아 등 고대도시 모두가 현재 이라크 영토 내에 들어 있다. 종합관개시설 및 홍수 통제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잉여 농산물이 생겨나 이를 토대로 강력한 도시국가가 번성하게 됐다. (지도 참조)

한편 메소포타미아는 크나큰 자연의 위협을 받는 환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위협은 오히려 사람들을 변화 무쌍한 자연의 심술로부터 안전 추구의 길로 내몰았다. 따라서 이라크 역사를 살펴보면 생존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자율적이며, 자족적인 다양한 사회 조직이 존재했던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르(UR)와 에리두(ERIDU)의 고대 종교의 신 숭배자, 7세기경의 시아파 알리 추종자, 오토만 터키치하의 길드나 도시거주자회 등 크고 작은 많은 조직이 자구책으로 결성되어 이라크 문화의 원심력을 이루었다.

그 외에도 중앙집권적 정치세력을 미약하게 한 두 가지 이유가 또 있다. 하나는 도로 구축에 필요한 돌이 없었고, 다음은 지리적이나 종교 중심으로 뭉친 아랍세계의 변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라크 역사에서 돌이 부족해 도로망 구축이 어려워 영토의 여러 곳에 중앙정부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비아랍국가인 터키와 이란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한편 비옥한 하천 유역에서 농업을 번성시킬 수 있어 이 주변국으로부터 여러 종족이 몰려들어 풍부한 문화를 갖게 된 반면 나라안의 균형과 질서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다. 그리고 종파간의 분쟁은 이때부터 고질화됐다.

이라크 역사는 지방의 분열된 지방자치 체제와 중앙집권체제 간에 자진 충돌과 여러 부족 간에 또는 여러 도시 간에 식량 생산이 가능한 하천 유역의 쟁탈전으로 점철된다. 중앙권력이 홍수통제와 수로작업을 방치하면 유역 평야는 황폐해지고, 이로 인한 식량부족으로 부족들 간의 약탈 전쟁이 불가피했다. 17세기 아바시드제국의 멸망으로부터 19세기 오토만 터키가 쇠퇴기에 들어서기까지 약 600년 동안에 걸쳐 이라크는 사실상 자치지역이었다. 20세기 초에는 서로 간에 단절 분열 됐거나 때로는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민족, 종교, 부족 등의 여러 사회집단은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심은 아주 없거나 조금 밖에는 없었다. 그 결과 이라크 현대사를 보면 주관심사는 부족과 민족 중심의 지역주의를 벗어나 국가적인 정체성을 부각시켜 어엿한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초기 탄지마트 개혁(Tanzimat Reforms: 오트만제국의 행정 및 법률 재편), 사유재산의 인정, 이라크의 세계자본주의 시장 참여 등은 이라크의 사회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샤이흐(Shaykhs)는 전통적으로 종교지도자로서, 부족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토지개혁과 계속되는 서구와의 접촉은 부족원을 빈곤한 소작인으로 전락시키고 샤이흐를 이윤을 추구하는 지주로 전락시켰다. 더욱이 한때 번창하던 기능공들의 제품은 기계로 짜낸 영국옷감으로 대체됐다.

▲ 티그리스강.
20세기 들어서 이라크 부족의 힘이 약해지자 그 덕으로 바그다드의 중앙정부체제는 강화됐다. 관료주의가 팽대하고, 교육기회가 많아지고, 석유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농촌에서 도시로 대규모 이주가 발생해 도농(都農)간의 균형이 깨졌다. 기존의 분파 지역주의는 붕괴되고, 경제력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계급이 급증했다. 이들은 사회의 안전에 기여하기 보다는 기존 세력인 부족사회의 반란과 도시 노동자의 폭동에 부채질하는 격이 됐다. 이라크는 20세기 전반기를 불안한 변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라크의 정치체계는 외국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그 정당성 여부의 갈등으로 크게 시달렸다. 1920년 국제연맹의 신탁통치 결정에 따라 영국정부는 이라크의 정부 및 정치체제의 기본 틀을 결정했다.

하시미테(하시미테 왕조: Husein ibn 〓 Ali와 그 후손들이 창건한 중동의 아랍 왕조) 군주제를 강요했다. 영국 정부는 이라크국경을 자연적인 경계와 전통적인 부족 또는 민족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는 바 오늘 날의 이라크 국경은 이때 결정됐다. 헌법 초안작성과 의회구조 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영국은 소수집단인 샤이흐나 도시에 근거를 둔 민족주의자들을 자기편으로 삼기 위해 지원 매수하는 한편 자국의 국익에 반하면 무력으로 위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1년에 일어난 라시드 알리 쿠데타다. 이라크의 민족주의자 장군이 친영파 수상을 몰아내고 라시드를 수상으로 옹립했다. 이라크의 안전을 구실로 영국은 이라크를 침공하여 1947년까지 무력 점령했다.

1918년부터 1958년까지 40년간 영국의 정책은 이라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의 이라크인은 정치현실에 무관심했다. 현실 정치는 내부갈등과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데 무관심하여 실패했고, 다만 법령에 따라 움직이거나 또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국민을 지배하는데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1958년 이후에 형성된 정치적인 리더십은 모든 정치 활동을 은밀하게 추진하며, 정부의 주요 활동도 베일에 가린 체 이루어졌다. 더욱이 국가적으로 이렇다 할 정치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은 소수 엘리트 집단, 또는 일부 부족과 가문 등이 독점했다.

1958년 군주국가의 전복으로부터 사담 후세인의 출현까지의 이라크 역사는 음모, 쿠데타, 역 쿠데타, 쿠르드족의 격렬한 봉기 등을 연대 순으로 늘어 놓은 것 같다. 그러나 1975년 초 사담 후세인과 이란의 샤 간에 맺어진 알제리아협정은 이라크 내의 쿠르드족에 대한 이란의 군사지원을 종식시켰고, 이라크에 전례 없던 안정기를 가져왔다. 그는 석유수입을 공공부문의 고용 증대, 중요한 교육 및 건강 개선 사업을 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이라크인은 여당인 바트당(Baath Party: Arab Socialist Resurrection)으로 몰려 들었다. 그 결과 이라크 현대사 가운데서 처음으로 이라크 지도자는 여러 가지로 얽혀있는 사회구조를 극복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정체성을 가진 국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의 성공과 이라크의 번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80년에 이라크 군대가 이란 국경을 넘어 침공해 8년 동안 값비싼 전쟁을 치렀다.

1988년 유엔의 결의로 피나는 전쟁이 끝난지 겨우 2년 후 1990년 또다시 쿠웨이트를 12만 명의 군대로 침공 점령해 합병을 선언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상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19번째 주였다. 다만 영국이 이곳을 인도로 가는 교통과 통신의 요지를 확보하려고 그곳의 부족을 종용해 분리 독립시켰다. 직접적인 침공이유는 이라크와 쿠웨이트 국경 밑에 상당한 원유가 양국에 걸쳐 부존돼 있는데 협의를 거치지 않고 쿠웨이트가 일방적으로 원유 생산을 했기 때문에 이라크가 그 원유 판매대금을 요청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엔은 이유없이 즉각 이라크에 철수명령을 내렸고 경재 제재조치를 취했다. 1991년 39개국의 유엔 연합군이 ‘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걸프전에 돌입해 쿠웨이트를 해방시켰다.

이라크는 경제 제재로 생필품 부족으로 생활이 비참했으며 석유판매도 최소한의 식량과 의약품만을 구매할 정도로만 가능했으며, 심지어는 연필, 볼펜, 지우개 등도 전쟁물자로 간주했다. 미국과 영국은 유엔의 결정도 국내법과 동일시해 국제 석유회사들이 이라크와 석유 협상을 할 수 없으나 프랑스, 이태리, 중국, 소련 등 국가의 석유회사는 이라크 정부와 석유 광구개발 협상을 했으며 한국도 꾸준히 협상에 임했다. 미국은 이라크 석유가 가상 적국에 넘어가는 것을 염려해 유엔의 결의 없이 대량 살상무기와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구실을 붙여 2003년 이라크를 일방적으로 무력 2차 침공을 감행해 점령했다. 이라크 국민은 20여 년간 4번에 걸친 전쟁으로 폐허와 헐벗은 가운데 울부짖고 있다.

후세인 정부가 몰락하고 새 헌법이 제정, 의회가 수립돼 새 내각이 수립됐으나 치안은 간데 없고, 문화생활은 더욱 나빠졌고, 폭탄 테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며, 미국은 재정상의 이유로 완전 철수하기에 바쁘다. 다만 유전 개발을 위한 외국 석유회사들은 제각기 광구를 하나씩 얻어 가지고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심혈을 기울일 뿐이다. 다음 호에는 시대별 역사를 둘러보고, 석유개발사를 살펴본 다음 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짚어보려 한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1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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