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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나(II)

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나(II)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1.12.0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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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부분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요람지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는 지명이지 국명(國名)이 아니다. 그리스어로 ‘메소’(meso)는 가운데, ‘포타미아’(potamia)는 강이라는 뜻이다. 합성어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사이의 지역을 말하는데 이 말은 로마의 역사학자 아리안(Arrian)이 ‘알랙산더대왕의 출정기’(The Campaign of Alexander the Great)라는 저서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현재 이라크 영토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에 있으며,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라고도 한다.

선사시대에서 유사시대로 이전시킨 문명의 요람지로서 이곳에서는 여러 문명이 탄생했다.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보다 이미 오래 전에 이 지역에서 먼저 선진문명이 번창했다. 기원전 4000년 이곳에 수메르 문화가 번성했다.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수메르에서 출현하게 된 것은 두 요인의 충돌에서 비롯됐다.

즉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범람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심한 홍수가 나면 강 주변의 사람은 물론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지만 한편으로는 수 백 년 된 기름진 옥토를 강 유역에 퍼부어 땅을 기름지게 해 주었다. 따라서 주변으로부터 남부 메소포타미아로 이주자가 모여 들어 증강된 노동력으로 기름지고 넓은 강 유역의 평야에 농사를 짓게 돼 역사상 처음으로 식량의 초과 생산을 이룩했다. 변덕스러운 두 강으로부터 늪지, 홍수, 침수를 막으려고 관개시설, 제방 구축 등을 위한 집단관리형태가 불가피했다. 잉여 농산물이 증가하고, 집단관리 체제가 더욱 발전됨에 따라 도시화 과정이 진전됨에 따라 수메르문명이 뿌리를 내렸다.

▲ 설형문자.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에 살던 수메리아인은 비옥한 농토와 풍부한 물을 사용해 정교한 관개시설(灌漑施設)을 발전시켰다. 아마도 최초로 보리, 밀 등 곡물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최초의 문자로 볼 수 있는 설형문자(楔形文字)를 사용했다. 쐐기문자라고도 하는 이 문자는 갈대를 쐐기모양으로 잘라 삐죽한 끝으로 젖은 진흙 위에 꾹꾹 찔러 흔적을 남겨 기록을 했다. 이것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뾰족한 갈대 펜으로 글씨를 새기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자인데 표음문자로 발전했다. 페니키아 인들이 사용한 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됐다.

▲ 진흙봉투.
이러한 문자로 글쓰기가 가능해져 복잡한 농업기술을 후세에 전해 줄 수 있었고, 그 기술로 농업생산량을 더욱 증대시킬 수 있었다. 이 글쓰기는 더욱 발전해 재산에 관한 사항도 기록하게 됐다. 진흙으로 만든 공 모양의 봉투 속에 거래내역을 나타내는 토큰을 그 속에 넣고 외부에도 내역을 적고 표시를 했다. 만약 거래내역에 이의가 있을 때는 그 봉투를 깨서 토큰을 확인했다. 나중에는 진흙봉투와 토큰 대신 진흙에 기호를 긁어 넣어 거래를 기록했다. 예를 들어 밀 2다발, 소 7마리 등을 기록한 것이다. 글쓰기가 점차 발전되자 그림 대신 쐐기 문자를 사용했고 기원전 3000년에 음절문자가 생겼다.

당시 상거래의 기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거래기록의 형식으로 복식부기를 사용했다. 이 놀라운 부기의 혁신은 오늘날에도 상거래기록의 표준양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상관습상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살 때 정상가격을 지불해야만 했다. 왕족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왕은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었겠으나 이집트의 파라호 같이 살아 있는 신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는 왕과는 달리 법적으로 유리하게 정해진 것은 없었다. 수메르인은 이웃 이집트인과는 달리 사유재산을 신봉했으며 왕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원 전 3700년 수메르인은 바퀴와 쟁기를 최초로 발명했다. 수메르인은 또 수 개념을 60진법으로 발전시켰다. 오늘날 사용하는 시간과 각도의 수치는 여기에서 생겼다. 수메르 사회는 모계 중심이며, 여성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은행의 기원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전과 왕궁은 안전한 곳으로 여기에 값나가는 물건을 보관했다. 곡물로부터 시작해 소, 농기구 및 귀금속 등을 맡기고 필요할 때 보관료를 지불하고 찾아서 썼다.

또 다른 중요한 수메르의 유산은 기록된 문학이다. 시 및 서사시가 많이 지어졌다. 수메르의 가장 유명한 서사시이며, 거의 완전한 형식으로 전해진 것은 길가메시(Gilgamesh)의 서사시이다. 길가메시 이야기는 미담으로서 대략 기원전 2700년 우륵의 왕이었던 길가메시가 자기 친구의 죽음에 대한 깊은 애도를 표하고, 불멸에 관해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주제는 파괴적인 홍수, 인간의 자연에 대한 미약함을 토로하고, 한 늙은 현자를 만나 방주를 건조해 홍수에서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로 끝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농산물이 경작됐으며, 달력이 처음 사용됐다. 최초의 알파벳도 여기서 발명됐다. 풍부한 땅, 깨끗한 물, 변화하는 기후 등은 깊은 문명의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했으며, 뒤주에서 인심이 나온다고 수 천년 이래 풍족하고 윤택한 삶은 인간성마저 좋게 발전시켰다.

▲ 수메르 대형 지구라트(Ziggurat) 현재 이라크 낫시리아 근처 소재.

수메리아 도시국가는 지역 신 또는 여신의 지배하에 있다고 믿었으며, 복잡한 의식절차와 종교를 감독하기 위한 사제관료제(司祭官僚制)가 생겨났다. 고위직 사제는 지상에 있는 신의 대리 역할을 했다. 그들이 하는 일 중에 하나는 신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 사제들은 지구라트(Ziggurats)에서 다스렸다. 지구라트는 햇볕에 말린 진흙벽돌로 쌓아 올린 신전으로 계단이 밖으로 나 있고, 올라가면 성소(聖所)에 이른다. 수메르 신들은 지방의 특징, 자연력(自然力) 등의 화신(化神)이다. 수메르인은 천상 최고의 신 아누(Anu), 물의 신 엔릴(Enlil), 신령술과 인간 창조한 신 에아(Ea)를 숭배했다.

결국 수메리안도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주한 아카디안(Akkadians)과 전쟁을 하게 됐다. 아카디안은 셈족 사람으로 셈어계의 언어를 사용했다.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아시리아어, 바빌로니아어 등이 셈어계에 속한다. 셈(Semite)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유래된 현대적인 명칭이다. 셈(Shem)은 노아(Noah)의 아들이고, 이 셈(Shem)의 후손들이 셈(Semite)족이다. 셈족 계통아 아닌 수메리안과 아카디안이 마주치자 그 찬란하게 이룩된 도시국가들은 점차 아카드에 자리 잡은 아카디안에게 넘어갔다.

이 거대한 제국의 수도 아카드는 2000년동안 중동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인 바비론이 출현하기 전까지 아주 강력했다. 기원전 2340년 위대한 군 지도자인 사르곤(Sargon)이 수메르를 정복하고 대부분의 수메르 도시국가를 포함해 멀리는 레바논까지 확장, 아카드제국을 건설했다. 사르곤은 제국의 본거지를 아카드에 뒀고, 이로 인해 사람들을 아카디안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이 야심 찬 제국의 존립은 메소포타미아 전 역사의 길이에 비춰 볼 때 눈 깜작 할 사이에 불과하다. 기원 전 2125년 남부 메소포타미아 도시 우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뒤이은 수메르 도시의 새로운 혁신 앞에 아카드제국은 무너졌다.

▲아카드 제국.

메소포타미아는 ‘에덴동산’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의문이 가는 지역이다. 우르(Ur)는 당시 수메르시대 유명한 도시로서 아브라함이 이곳 출신이고, 그 북쪽이 에덴동산으로 추측되는 지역이다. 바빌로니아(Bab-ili: 신의 문이라는 뜻)가 생기기 2000년 전에 파라(Fara: 바빌로니아 동남쪽 160㎞)라는 곳에 노아가 살았다.

고대 아시리아인은 전사(戰士)로 알려졌다. 최초의 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났고, 그 후 전쟁이 끝일 날이 없었다.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바빌로니아는 중부와 남부에 있었다.

함무라비

수메르문명 쇠퇴 후 기원 전 1700년 바빌론(1792~1750 기원전)의 함무라비왕은 사람들을 다시 결속시켰다.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번성했다. 바빌로니아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 수메르와 아라비아 만까지 뻗어 나갔다. 그는 자신의 제국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북부 유역,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까지 확장했다. 그는 영토를 합병해 중앙정부 통치 하에 두고 영토 보전과 제국의 번영에 전력을 다했다. 함무라비왕국(구 바빌론 왕국)은 기원 전 1530년까지 200년간 지속됐다. 이 왕국의 통치 기간 중 바빌로니아는 최고의 번영을 이룩하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함무라비는 그의 긴 통치기간 중 자신이 직접 항해, 관개, 농사, 세금징수 등을 감독하고 많은 신전과 건물을 건축했다. 비록 그가 성공한 군사지도자이지만 함무라비는 바빌로니아 생활에 영향을 줬던 법률을 성문화 한자로 더 기억된다.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구성하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두 문명을 융화 시켜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함무라비 법전

함무라비는 왕이며 구 바빌로니아의 위대한 법률 제정자였다. 그의 법전은 통치 2년 차에 만들어졌다. 많은 새로운 법리(法理)가 바빌로니아에서 생겨 났고, 이 법리는 다른 문명권에서도 받아 들였다. 주요 법리는 법은 반드시 하층계급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 국가는 법 집행의 책임자이며, 사회정의는 보장돼야 하고 처벌은 죄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함무라비 법전-‘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 오늘날에도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그 중요성이 증명된다.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로니아 왕 함무라비의 포고령과 법률을 집대성한 것으로 역사상 알려진 가장 오래되고 포괄적인 법전이다. 이 법전은 2.4m 높이의 검은 섬록암(閃綠巖)에 새겨졌다.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1901~1902년 동안 탐사한 이라크 수사(Susa)에서 발굴했으며, 현재 루버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 공중정원.

바빌론의 공중정원(The Hanging Gardens of Babylon)


그러나 함무라비가 죽은 후 아들이 통치 할 때부터 카지테(Cassites or Kassite) 부족이 공격을 시작했다. 수세기 동안에 걸쳐 바빌로니아는 카지테에 의해 약화됐다. 마침내 카지테 왕국이 기원 전 1930년쯤에 바빌로니아에 세워졌다. 이때쯤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또 다른 문화권인 미타니(Mitanni)라는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미타니는 이 지역에서 주요한 한 시대의 제국으로 군림했다. 동쪽의 아시리아를 예속시켰고 북서쪽은 카지테와 접했다. 그러나 미타니는 150년 밖에 지속돼지 못했다.

미타니로의 정치적 내분으로 자유를 얻은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의 주 세력권자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했다. 나아가 미타니를 멸망시켜 합병함으로써 바빌로니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했다.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를 약화시켜 카지테를 실각시키고 사실상 바빌로니아를 반란이 일어나 쫓겨날 때까지 지배했다. 그 후 이신(Isin)의 두 번째 왕국을 세웠다. 이 왕국의 네부차드네자르(Nebuchadnezzar) I세는 바빌로니아 영토를 상당히 넓혔다. 그리고 종국에는 2세기 동안이나 지속된 아시리아를 공격했다.

아시리아 문화는 과학과 수학에 있어 극적인 성장을 보여줬다. 아시리아인의 가장 위대한 수학적 발명은 원을 360℃로 나눈 것과 최초로 지리학적 항해에 경도와 위도를 발명한 것이다. 그들은 의학을 정교하게 발전시켰으며 그리스 의학발전에 많은 영향을 줬다. 기원전 6세기경(기원전 586년) 네부차드네자르는 유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했다. 솔로몬의 신전도 아울러 파괴됐다. 그리고 1만5000명으로 추산되는 유대인을 바빌로니아에 유배시켰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최고 특징적인 우수성은 신 바빌로니아 왕국 나보플라샤르(Naboplashar)의 통치시대(기원전 625~605)에 와서야 비로서 나타났다. 그의 아들 네부차드네자르(Nebchadnezzar) Ⅱ세(기원전 604~562)는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The Hanging Garden)을 건설한 공로를 인증받았다. 이 정원을 건설하게 된 동기는 네부차드네자르페의 부인 또는 산으로 둘러 쌓인 메디아(Media)에서 자란 후실 아미티스(Amyitis)을 위해서라고 전해진다. 바빌로니아 평원에 싫증을 느낀 아미티스를 위해 ‘공중정원’을 통해 고향 향수를 느끼게 해 기쁨을 주려고 했다고 한다.

이 정원은 기원 전 600년에 완성됐다. 공중정원은 지상 23m 위에 석조 아취 위에 지어졌으며, 급수는 복잡한 수로망을 통해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흘러 들어오게 했다. 네부차드네자르Ⅱ세는 과거의 바빌로니아 영광을 되찾았고, 바빌론을 고대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로 만들었다.

유프라테스강 동쪽, 바그다드 남쪽 약 50㎞ 지점에 위치한 공중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도 여겨졌다. 모든 식물은 그 뿌리를 땅속에 내리지 않고 상층 테라스에 내려졌다. 이 정원의 모든 것들은 돌기둥으로 받혀졌고 물은 높은 곳에 만든 수원지로부터 경사를 타고 흘러 내려왔다. 이러한 관개시설은 정원의 모든 식물과 뿌리를 흠뻑 적시고 정원 전체의 습도를 맞췄다. 따라서 풀은 항상 푸르렀고, 나무 잎은 싱싱한 가지에 매달려 튼튼하게 자랐다. 이것은 왕의 호화로운 사치를 나타내는 예술작품의 극치이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관중의 머리 위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기원전 626년 찰데안(Chaldeans: 메소포타미아 남부 부족)은 나보포라사르(Nabopolassar)가 바빌로니아의 권력을 잡는데 협조했다. 그 당시 아시리아는 이란 메디아 지방의 메데스에게서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나보포라사르는 메데스아 연합했고, 이 둘의 압력에 견딜 수 없었던 아시리아는 기원전 612년 수도 니네베(Nineveh)가 함락됐다. 한때 위대한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 모두가 불타고 약탈당했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1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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