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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VI)

이라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VI)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2.04.0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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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지배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 때 터키는 영불(英佛)이 독일과 맞서 싸우는 세계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 편에 가담했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부터 아랍 독립운동은 탄력을 받아 활발히 움직였다. 아랍세계 도처에서 후세인 하시미테가를 포함해 여러 아랍지도자들은 오토만터키에 완강히 저항함으로써 영국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전후 영국은 아랍독립에 협조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아랍은 이를 믿고 협조를 하게 된 것이다. 1917년 영국은 메소포타미아를 침입해 바그다드를 점령함으로써 오토만제국은 붕괴됐고 이듬해 1918년 터키와 휴전조약이 체결했다. 아랍지도자들은 아랍독립에 관한 언급을 기대했으나, 1920년 국제연맹은 오토만제국 영토의 일부였던 메소포타미아를 승자인 영국 행정부 손에 넘겼다. 이러한 조치는 영국의 책임하에 연맹이 승인한 시간표에 따라 이 땅에 책임지는 아랍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 계획을 수행하지 못한 영국의 실패는 오히려 아랍 민족주의자들에게 용기를 줬다.

영국은 이라크 석유이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유럽으로부터 터키와 이라크를 거쳐 페르시아만에 접한 쿠웨이트까지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 부설을 노리고 있어 더욱 더 지배 통치를 하려고 했다. 이 철도는 인도와의 무역을 저 멀리 아프리카 남단을 돌지 않고 직접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국에게 필요했다.

▲ 1927년 이라크 바바 굴굴의 유정탐위로 치솟는 유징.
시리아 타와라지방의 반란은 1920년 이라크의 봉기를 초래 했으며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으려고 시도했다. 영국 정부는 이라크가 혼란상태 빠지자 새로운 계획 수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정부는 이라크의 정부 및 정치를 위한 제도적 구조를 마련했다.

이라크 정치제도는 합법성과 정당성의 문제로 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영국은 하시미테 군주제를 도입하고, 국경을 정하는데 있어 자연적인 상태와 전통적인 부족 및 종족 등을 고려하지 않고 결정했다. 그리고 헌법제정과 의회 구조 확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도시를 발판으로 날로 성장하는 민족주의자보다 소수의 부족 세이크를 지지하고, 1941년 알 가이라니 쿠데타 진압에서 보였듯이 영국은 자국의 이익이 위협 받을 때마다 언제나 군사력으로 억제했다. 이라크왕국의 파이잘 1세는 이웃 요르단의 새 지도자이자 하시미테가의 일원인 압둘라와 형제이며, 1921년 선출된 군주로서 엄연히 존재했지만 1932년 영국의 통치가 공식적으로 끝날 때까지 이라크는 온전한 왕국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27년 킬쿡 근처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됨에 따라 이라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라크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는 ‘이라크 석유회사’에 석유조광권을 허가해줬다. 이라크는 그 해 10월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공식적으로 독립주권국가로 인정받았다. 1933년 파이잘이 죽자 그의 아들 가지왕이 승계했다. 1945년 3월 이라크는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예멘 등이 가입한 아랍연맹의 창단 멤버가 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국제연합(UN)에 가입했다.

이라크 왕국

1936년 가지왕 1세(King Ghazi I)는 범 아랍운동으로 알려진 아랍동맹을 결성했다. 이는 사실상 불가침조약이며 아랍 국가간에 긴밀한 유대감의 약속이었다. 또 같은 해에 이라크는 근대 아랍세계에서 바크르 시디키 장군(General Bakr Sidqi)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를 처음으로 겪었다. 이 쿠데타는 이라크 역사상 큰 전환점이 됐다. 즉 헌법상의 중대한 위반을 통해 향후 군부의 정치 개입 문호가 열리게 된 것이다.

▲ 가지왕이 즐기던 1936년식 벤즈 540K.

시드키 장군과 더불어 군부쿠테타 요원인 슈레이만이 비록 국방장관을 살해하고 기존의 야신 정부를 몰아내고 새로이 슐레이만 정부를 수립했다. 가지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시드키는 결국 민간 및 군부 추종자들로부터도 소외돼 1937년 군인집단에게 살해됐다.

1938년 가지왕은 자신의 꿈인 ‘비옥한 초승달 운동’(가지왕은 한 방송국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 쿠웨이트가 이라크로 합병되는 것을 기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의 첫 단계 조치로 쿠웨이트의 강제 합병을 계획했다. 그는 방송을 통한 선전과 군사위협을 병행하면서 정부에 보다 많은 참여를 원하고 있는 쿠웨이트 중산층의 열망을 이용해 쿠웨이트 내에 반대세력을 조장했다.

그러나 그는 쿠웨이트 북부국경에 이라크 군대가 집결해 작전을 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고속 자동차에 미친 가지왕은 실패를 자초하고 말았다. 1939년 4월 3일 왕은 자기 자동차로 가로등을 들이 받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가지왕의 후임은 섭정을 전재로 세 살짜리 파이잘 II세가 승계했다. 가지왕의 사촌인 아미르 아브 알 일라(Amir Abd al Ilah)가 섭정자가 됐다. 파이잘 II세는 요르단 왕 후세인 빈 탈랄의 사촌으로 1953년 18세가 될 때까지 형식적인 왕에 불과했으며,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파이잘과 가지는 강력한 아랍 민족주의자로서 영국의 지지를 받는 부족 세이크와 대립관계에 있는 반면 아부 알 일라와 누리 알사이드(Nuri al-Said; 영국 치하의 정치가로서 이라크에서 총리를 7번이나 지냄)는 이라크 민족주의자로서 도시에서 팽대하는 민족운동에 대항세력으로 부족 세이크와 손을 잡았다.

1930년대 말경 이라크 군부 내에 범 아랍주의가 막강한 이데올로기 세력으로 등장했다. 특히 북부출신 젊은 장교들 간에 또는 오트만터키의 분할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장교들 간에 더욱 심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팔레스타인 반란을 진압하려는 영국군의 개입은 이라크 군부 내의 반영정서를 더욱 부추겼다. 그리고 불만을 품은 젊은 장교들은 군주국가의 전복을 목표로 그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다.

▲ 1941년 쿠데타를 성공하고 라시아니 알리가 베르린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초기 이라크 정부는 극히 친영적(親英的)이었으나 이라크 민족주의자이며, 영국을 아주 싫어하는 라시드 알리 알 가이라니(Rashid Ali Al-Gaylani)가 누리 알 사이드 수상의 뒤를 이었다. 신임 수상은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로 나치 독일과 유대 강화에 노력했다. 라시드 알리는 이라크 내에서 영국군의 이동 제한을 제의했다.

그러나 영국의 지지자였던 아브 알 일라와 누리 알 사이드는 라시드 알리 정책을 반대하고 수상직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했다. 이에 라시드 알리는 1941년 4월 1일 이라크 군대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했다. 섭정자와 그 수행원들은 바스라를 거처 요르단 암만으로 탈출했다. 라시드 알리는 ‘황금의 광장’이라고 별명이 붙은 4명의 장군과 1941년 4월 3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누리 알 사이드와 섭정자를 축출하고, 잠정적으로 궐석 중인 섭정자 지위를 철폐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독일대사관과 주 이라크 독일 대사인 그로바 박사는 바그다드에서 반유대 정서에 불을 지르고자 자금지원 등을 통해 반유대 서적과 영상물을 공급했다. 거리에는 영국과 유대인을 반대하는 폭력배와 학생들의 가두데모로 넘쳐났다.

1941년 잠시 권력을 장악했던 라시드 알리 알 가이라니는 초 민족주의자 민간인 내각을 임명했다. 이 내각은 1941년 4월 영국이 이라크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겠다는 요청을 단지 조건부로 동의 할 수 있다고 했다. 영국은 라시드 알리가 1930년 앙그로 이라크간의 조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를 들어 재빨리 4월 19일 바스라에 군대를 상륙시켜 보복했다. 많은 이라크인들은 영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통치를 재정립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라크 군대는 바그다드 서쪽에 위치한 하바니아 영국 공군기지 주변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5월 2일 영국사령관은 이라크의 선제공격을 우려해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 전황은 영국이 우세했으며,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충원을 받은 영국군은 하바니아를 떠나 바그다드로 진군했다. 영국·이라크전쟁은 영국이 안전하게 진척시키면서 한 달 남짓 지속됐다. 마침내 5월 30일 라시드 알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국외로 탈출했다.

▲ 유니스가 아랍어로 번역한 ‘나의 투쟁’이란 책.
같은 날 나치파 두목이며 자칭 중남부 이라크의 총독이라 칭하는 유니스 알 사바위(Yunis Al Sabawi;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차관을 지냄)에 의해 악마의 음모가 시작됐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오순절 기간 중(5월 31일 토요일부터 6월 2일 월요일까지) 집에 머물러 있으라 명령했다. 그는 이 기간 중 자기 휘하에 있는 청년 나치조직을 이용해 유대인을 살해하려고 했으나 사바위는 같은 날 이란 국경으로 강제 추방됐다.

1941년 5월 31일 바그다드에는 내일 섭정자와 그 수행원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그다드 유대인 학살사건(Farhud)은 6월 1~2일 일요일과 월요일 양일간의 오순절날 일어 났다. 1941년 6월 1일 오순절 첫날 돌아오는 섭정자를 환영하러 유대인 대표들이 비행장으로 갔다.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알 쿠르 다리에서 군인과 민간인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한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가 병원으로 실려 갔다. 테러는 밤 10시까지 계속됐다.

1941년 6월 2일 오후 5시에 통행금지가 선포돼 누구든지 거리에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총살됐다. 이라크는 이틀간 187명이 살해됐다는 공식발표를 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이라크의 무슬림들은 유대인들을 집에 숨겨주며 보호해 줬다.

▲ 화가 Nissim Zalayett의 바그다드 유디인 학살에 대한 그림.

라시드 알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총통의 손님으로 독일에 가려고 이란으로 탈출했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치를 도와 아랍세계에 방송을 하면서 지냈다. 그는 독일이 이집트와 코카사스 지방에서 협공을 할 때 재집권을 하려는 계획을 세워 놓았다. 전쟁 후 그는 사우디 아라비아를 피신 망명처로 승인받았다. 그리고 1958년 혁명(이라크 군주국의 종식) 후 이라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라크에는 새로운 친영국 정부가 수립됐으며, 아브 알 일라가 또 다시 섭정자가 됐고 수상에는 누리 알 사이드가 맡았다. 영국 군대는 이들을 보호해 줬으며, 이듬해부터 이라크는 특히 소련으로 무기를 실어 나르는 영국과 미국의 병참기지화 됐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2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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