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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석유는 어디로 흘러가나(I)

이라크 석유는 어디로 흘러가나(I)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2.12.0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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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라크 석유개발 참여

1979년 한국은 이라크 원유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필자가 대한석유공사(유공→SK에너지) 기획부장으로 재직 시 정부의 수입 허가를 받는데 적지 아니 힘들었다. 당시 이라크와는 비 수교국이고 도입하려는 원유는 바스라 중질(重質) 원유로 유황 함량이 높아 공기 오염 문제를 제기하면서 허가를 지연시켰다. 유공의 경영진에 대한 (미국인 걸프직원) 재촉이 심했다.

그들의 한국에서 업무 스타일은 언제나 일단 저질러 놓고 사후 처리 하는 방식으로 한국인 직원을 몰아세웠다. 정부로서도 2번에 걸친 석유 파동을 겪었기 때문에 도입선을 다변화 한다는 취지 하에서 결국 도입허가를 승인했다. 그 후 이 원유도입이 계기가 돼 이라크와는 국교를 맺었다. 이어 건설, 무역 등으로 경제교역은 폭넓게 활발해졌다.

현재 한국석유공사가 쿠르드 지역에서, 한국가스공사가 남부에서 석유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라크 원유는 최근까지 도입됐으나 중앙정부는 쿠르드 지방정부와 체결한 석유개발계약이 정책에 반한다며 석유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필자가 이라크 역사와 사회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우리 정부나 실무자들이 이라크에 관한 역사, 사회구조,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관계 등 자세한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방정부와 일방적으로 석유개발 계약을 체결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블랙리스트에 올라 중앙정부가 관장하는 초대형 내지 대형 유전개발에 있어 입찰 자격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쿠르드와 체결한 광구에서 시추를 했으나 아직 석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지난 10년간(1993~2003년) 공들인 할파야(Halpaya) 초대형 유전을 고스란히 중국에게 내주게 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 났는지 그 과정을 하나하나 적어보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지만 실수는 반복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다.

필자가 이라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스라 원유 도입 후 이라크 출신 한 석유지질학자를 업무상 알게 되어 친교를 갖게 되면서부터다. 칼리드 아민(Mr. Kahlid Ameen) 씨인데 현재 귀화해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다. 필자는 인도네시아에서 2년간 석유개발을 직접 해본 경험이 있다.

코데코석유회사는 인도네시아 마두라에서 석유개발도중 자금난에 봉착해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석유공사는 직접 운영을 하는 조건으로 석유기금에서 자금지원을 하게 됐고 필자는 코데코의 부사장으로 1990년부터 다음해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이때 아민 씨와 자주 만나게 돼 이라크 석유개발의 참여방법을 협의하고, 주 싱가포르 이라크대사를 만나 의사를 타진,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이라크대사는 우선 한국으로부터의 군복을 다량으로 매입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달라고 요청을 해 왔다.

이에 모 한국 수출업체를 주선해 구체적인 협상까지 진척이 됐지만, 걸프전이 발발해 중단됐다. 이 때 싱가포르은행에 예치된 이라크 정부예금이 순식간에 동결되는 것을 이라크 대사를 통해 알게 됐다. 이때 난감해 하는 대사의 얼굴을 보면서 다시 한번 막강한 미국의 힘을 피부로 느꼈다. 이뿐만 아니라 전세계은행의 이라크 정부예금은 모두 동결 됐다고 한다. 사실상 이 걸프전이 일어났기 때문에 필자가 이라크 석유개발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다.

필자는 석유공사 부사장으로 승진 후 서울 본사로 복귀해 근무 한지 2년 후인 1993년에 퇴직했다. 그간 아민 씨가 석유공사에 필자를 만나려고 몇 차례 연락했으나 나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 후 우연히 공사에 들렸다가 아민 씨가 보낸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아 보고 그에게 연락을 하니 이제 그곳에서 석유개발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기술진과 함께 바그다드로 떠나자고 제안했다. 그 때 필자는 석유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주)한얼상사를 지인을 통해 알게 됐고,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진출 계획을 수립해 바그다드 출장을 가기에 이르렀다.

1994년 6월 드디어 석유를 잡으려고 바그다드 석유 굴로 들어가게 됐다. 이렇게 표현하게 된 것은 엑슨이 한때 자사 제품 휘발유를 타이거라고 부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주유를 이렇게 표현 했다. ‘탱크에 호랑이를 채우시오’(Put the Tiger in your tank.) 지질 전문인 아민 씨, 지구물리 전공인 네덜란드인 M씨, 필자 등 3명이 바그다드를 향해 장도에 올랐다. 우리 일행은 싱가포르에서 만나 요르단의 암만으로 갔다. 이라크에는 비행금지 구역이 설정돼 부득이 암만에서 육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것도 햇빛이 강렬하게 내려 쪼이는 사막 한가운데로 뻗어 있는 아득한 고속도로를 14시간이나 달려 바그다드로 향했다.

▲바그다드까지 뚫는 고속도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필자 일행.

등산에 비유한다면 암만은 베이스캠프인 셈이다. 이곳에서 물, 커피, 소스, 버터, 치즈 등 이라크에 머무를 때 필요한 생필품과 선물용으로 맥주, 설탕, 홍차, 담배 등을 구입했다. 특히 절친했던 바그다드대학 지질과 과장이었던 나카시교수(Dr. Adnan B. Naqash)는 미국 주간지 타임(TIME)을 사다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립되고 폐쇄된 사회 속에서 이런 잡지를 들추는 것이 외부 세계의 흐름과 유일하게 연결되는 길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 필자 일행은 갓 구워낸 빵을 요르단 국경에서 아침으로 먹었다.
4~50℃가 넘는 사막 한가운데를 승용차로 가야 하니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새벽 계명성을 바라보며 4시에 암만을 출발해야 더위도 피하고 바그다드에 저녁때쯤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용한 승용차는 미국산 대형 왜건으로 이라크에 등록돼있었고 운전수 또한 이라크인이었다.

암만에서 이라크 국경까지 도로상태는 그리 좋지 않고 2차선과 4차선이 번갈아 이어진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4시간 정도 잠결에 달려오니 국경 지대에 이르렀다. 요르단 쪽인 카라매(Karameh)에서 아침으로 양고기와 중동식 빵을 먹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둘러보니 길 건너편에 대형 유조차가 이라크로부터 원유를 싣고 요르단으로 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루에 이러한 유조차가 수 십대씩 지나간다고 하는데, 유엔감시를 피해 밀수입하는 장면이었다. 얼마 후에 안 사실인데 미국도 알면서 모른 체 하는 것이였다.

▲ 유엔의 눈을 피해 대형 유조차가 수 십대씩 이라크에서 요르단으로 넘어왔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저 멀리 양떼가 지나가거나 낙타무리가 어슬렁 거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은 공허한 사막에 시선을 둬야만 한다. 마치 화성이나 달에 온 것은 아닌가라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암만에서 카라메까지 320㎞, 여기서 바그다드까지는 575㎞. 우리 일행은 총 895㎞를 열사(熱沙)의 사우나 속에서 계속 달려목적지에 도착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이 펼쳐져 있다.

요르단에서 이라크로 입국하데 별다른 특색은 없고 다만 비자 발급 수수료가 국가별로 다르다.

이라크 국경지역인 투레이빌(Turaybil)에 도착하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입국심사실에서는 이라크 입국을 환영한다는 간판이 보이거나 환영의 기색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우선 서너 명이 앉아서 여권을 이리 저리 살펴보고 비자 명부와 대조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고 이어진 소지품 검사도 복잡했다. 미국 돈이 문제 인데 두 가지를 위해 100달러짜리 지폐는 일련번호를 일일이 모두 적는다. 100달러 100장이면 100개의 일련번호를 적으니 알만하다. 그 두 가지 이유는 위조지폐를 방지하고 후세인 정권의 불온세력에 돈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보통 4~5시간이 걸려서 입국이 허용되면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검사원이 슬며시 없어진다. 이방 저방 찾아서 서류를 넘겨주면 본체만체한다. 우리는 그래도 이라크 석유성의 비자노트를 소지해 그나마 좀 빠르게 통과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손에 20달러를 쥐어 주면 30분이면 해결되고 짐도 뒤지지 않는다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 행도 이 못된 편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라크 비자 발급을 기다리는 필자.

모든 절차를 끝내고 국경을 넘어 들어가는 기분은 언제나 험악한 특수 훈련장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좀더 심하게 말한다면 지옥의 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참새는 여전히 지저귀고 파리떼는 쫓아도 계속 날아드는 것을 보니 저승은 아니고 이승이 분명하다.

▲ 요르단과 이라크를 나누는 국경 검문소의 모습.
이라크 땅에 들어서니 더 더운 것 같았다. 그리고 입국절차를 받을 때부터 살벌하게 보이더니 이제 긴장감은 더욱 고조돼 갔다. 아민 씨가 미리 석유성 인사들과 만나기로 약속은 해 놓았지만 만나 줄지 불투명했다. 공식초청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찾아가는 길이 아닌가? 과연 그들이 유전개발 협상에 응 할 것인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기나 하는지, 경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들은 잘 모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도 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이제 한낮이 되니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에어컨은 소리만 요란할 뿐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4자 성어를 떠올리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리니 한결 편안해졌다. 한참을 더 달리다 보니 앞에 시퍼런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지 않는가? 바로 유프라테스강이 시원하게 흐르는데 우리의 눈을 의심케 한다.

▲ 수만년을 굽이쳐 흐르는 유프라테스강.
이 강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탄생시켰고, 이라크 농업 생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는 터키와 시리아가 댐을 구축해 수량이 줄고 있다. 이라크는 이들 두 국가의 잘못이라 이야기하는 반면 이들 국가들은 이라크가 하천 관리를 소홀이 해서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어찌했던 사막 한 가운데 시퍼런 물이 넘실대며 흐르는 것을 보게 되니 가슴 속이 시원해지면서 문득 초등학교 시절 달달 외우던 세계 4대 문명 발상지가 머리에 떠 오른다. 그리고 잠시 후-석유를 찾아 이곳까지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생각에 잠겼다. 한때 한국의 경제성장과 석유수요증가간의 탄성치가 1인 적이 있었다. 즉 경제가 8% 성장하면 석유수요도 8% 증가한다. 그러하니 석유가 있다면 어딘들 못 갔겠는가.

유프라테스강 뒤로하고 얼마 지나니 다시 피곤이 온몸을 휘감았다. 암만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해 국경에서 진을 빼고 식사 또한 신통치 않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제 한 서너 시간 남았다고 하는데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잠을 청해보나 온갖 잡념이 여름날 뭉게구름처럼 일어났다가 불길한 생각이 소나기처럼 고요한 마음을 두들기고 지나간다. 잠깐 졸고나니 눈앞에 불빛이 어른거린다. 드디어 바그다드에 들어선 것이다. 석유굴로 들어왔으니 정신을 차려 무엇인가를 얻어 가야 할 것이 아닌가? 마음이 바빠진다.

투숙할 호텔은 알 라시드(Al-Rashid Hotel in Bagdad). 한때 중동에서 제일가는 호텔이었으며, 걸프전 때 연합군이 유일하게 폭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당시 이 호텔에 외신 기자와 많은 외국인이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호텔 정문에 들어서니 바닥에 ‘부시는 범죄자이다’(Bush is criminal.)라고 적색 대리석으로 모자이크처럼 박아 놓았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국제회의 때는 카펫으로 덮어 놓는다고 한다. 아깝게도 이 대리석을 잘 찍어 놓은 사진을 찾지 못했다. (다음호에)

▲ 알 라시드 호텔 앞에 주차된 차들(좌)과 알라시드 호텔 전경(우).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CEO ENERGY>2012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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