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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보유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석유보유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1.02.0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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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지구상에 석유를 하루 100만배럴 넘게 생산하는 국가는 23개국이나 되지만 이 가운데 1인당 국민 소득이 3만불 넘는 나라는 7개국 뿐이고 심지어 1만불 이하 국가도 7개국이나 된다. 그리고 보유한 석유를 무기로 삼아 독자노선을 걸으려던 베네수엘라, 이란, 리비아, 이라크 등 4개국 중 리비아와 이라크는 미국의 거대한 힘에 밀려 굴복했거나 붕괴됐으며, 남은 두 나라 베네수엘라와 이란은 계속 미국과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상의 4개국 중 먼저 베네수엘라를 필두로 이들 국가의 역사와 석유이야기를 해나가려고 한다. 베네수엘라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간단하게 짚어 본 다음 석유 이야기로 넘어가려 한다.

1498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탐험대가 베네수엘라 동쪽 해안을 처음으로 항해하던 중 베네수엘라 북동쪽에 위치한 소위 ‘진주섬’이라고 불리는 쿠바구아(Cubagua)와 말가리타(Margarita)를 발견했다. 그 후 스페인 원정대는 이 섬에서 원주민을 노예로 삼아 진주를 집중적으로 채취해 이곳을 식민지의 보고 중에 하나로 만들었으나 결국 무리한 채취로 진주 밭도 노예도 모두 황폐해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식민지 착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 베네수엘라 국기와 문장
(1508 ̄1531). 베네수엘라의 명칭은 스페인 원정대가 베네수엘라 만을 보고 이태리 도시 베니스를 떠올려 베네수엘라(Venezuela)라고 칭하게 됐는데 이는 스페인어로 ‘작은 베니스(Little Venice)’라는 뜻이다.

베네수엘라 본토는 1522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됐다. 그 후 200여년이 흘러 뉴 그라나다 (New Granada) 시대 (AD 1740 ̄1810)로 접어들었다. 뉴 그라나다의 수도는 보고타(Bogota)로, 현대국가인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을 한데 묶어 스페인이 총독정치를 펼쳤다.

1810년 카라카스에 한 젊은 장교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후세에 위대한 장군이며 남미의 해방자로 불리는 사이먼 볼리바르(Simon Bolivar)다. 베네수엘라에서 출생했고,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사 가운데 중심인물이다.

그는 군사 반란음모에 가담해 스페인 총독을 몰아내고 카라카스를 장악했으나 얼마 뒤 스페인의 반격에 밀려 피신했다. 그 후 그는 12년동안 오직 뉴 그라나다를 스페인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일념으로 줄기차고 끈질기게 스페인 총독에 대항했다.

그의 해방운동과정에서 전세가 여러 번 뒤바뀌곤 했다. 볼리바르는 카라카스를 놓고 스페인과의 두세 번 공방 끝에 베네수엘라의 오리노고강(카라카스의 동남쪽에 위치)근처에 새로운 군대를 조직해 전열을 가다듬고, 오히려 카라카스를 공격하지 않고 소가죽 보트를 타고 오리노고강을 건너 안데스를 넘어 뉴 그라나다의 수도인 보고타를 공격해 1819년 스페인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뉴 그라나다를 ‘콜롬비아 공화국’이라 개칭해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는 스페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후 1821년에 카라카스를 탈환했고, 1822년 에콰도르도 해방시켰다. 후에 사학자들은 이 나라를 ‘그랜 콜롬비아(Gran Colombia)’라고 칭했다. 볼리바르장군이 시도하려는 3개국의 통합은 당시로 보아 시대착오이긴 하나 이는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북미의 연방제가 성공한 것을 보고 남미도 연방제를 성립시키려고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1830년 베네수엘라는 그랜 콜롬비아에서 분리돼 독립했다. 1830년 5월에 볼리바르는 대통령직을 그만두고 결핵치료차 보고타를 떠나 유럽으로 가던 중 산타 마르타(Santa Marta)에서 그랜 콜롬비아가 와해된 것 조차 모르고 남미 연방제를 가슴에 안고 생을 마쳤다.

1830년에 새로 태어난 베네수엘라 공화국에서는 1945까지 115년 동안 남미식 독재체제인 ‘카우딜로(Caudillo)’가 지속됐다. 그도 그럴 것이 300년 넘게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독립을 위한 장기간에 걸친 식민지 해방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정치, 사회, 경제 등이 혼란스럽고 무질서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군사독재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 카라카스 볼리바르 광장에 있는 장군 동상

그랜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베네수엘라의 애국자 호세 안토니오 파에즈(Jose Antonio Paez)가 1831에 대통령으로 당선돼 명실공히 실권을 가진 독재 정치가 시작됐다. 그 후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에 잦은 충돌이 있었으나 결국 진보주의자가 우세해 지방자치권이 확대되고, 자유재량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무분별한 해외 자본 유입으로 1902년에 국제채무 불이행 상태가 되어 채권국인 독일, 영국 및 이태리에서 전함을 보내 위협하려 했으나 미국의 설득으로 저지됐다.

그리고 12년 후인 1914년에 더 많은 해외 자본이 유입됐으니 이는 마라카이보 호수(Maracaibo Leak) 근처에서 석유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1920년대 말, 베네수엘라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2의 석유 생산국이 됐다.

예기치 못한 석유의 분출은 주로 외국석유회사와 독재군벌만을 부유케 해줬을 뿐이다. 여기서 20세기의 지배적인 카우딜로인 주안 빈센테 고메즈(Juan Vinsente Gomez)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운 독재자로 1908년부터 권력을 유지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권좌에 있던 시절에 ‘안데스의 폭군’이라 불렸으며 흔치 않게 순수 아메리칸 인디안 혈통을 가진 카우딜로였다.

1935년 그가 죽은 후 승계한 대통령은 도로, 전기, 수도 등 사회적 기간 산업에 투자를 감행했다. 그 뿐 아니라 추방됐던 고메즈의 수많은 정적들이 돌아와 정당을 결성했는데 이 때가 바로 베네수엘라 현대사의 전환점을 이룬 시점이다. 1945년 군민이 협동해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추후 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하에 임시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새로운 민주적인 헌법이 제정, 1947년에 선포됐고, 이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 액치온 데모크리티카(Accion Democratica)정당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1년 만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또다시 군사 독재가 10년이나 계속되다가 1958년 종식되고 다시 민주화가 시작됐다. 1968년에는 처음으로 기독 민주주의자가 집권해 25년간 성공적으로 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1998년 선거 결과결과에서는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극적인 방향 전환이 이뤄졌다. 1992년 군사 쿠데타의 실패로 2년 동안이나 복역한 전 공수부대 출신 우고 차베스(Hugo Chavez)가 예상을 뒤엎고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해방자인 볼리바르 유령의 망토를 둘러쓰고 자신이 스스로 새로운 혁명의 선도자라고 나섰다. 그리고 국명 조차 볼리바리안 베네수엘라 공화국(Bolivarian Republic of Venezuela)이라고 개칭했다. 그리고 육군 장교를 정부행정요원으로 기용하고, 1990년부터 도입된 자유시제도를 수백만의 빈곤층을 구제한다는 명분하에 철폐시켰다.

그는 2000년과 2006년 두 번에 걸쳐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더 나아가 장기 집권을 노려 대통령직 임기를 철폐하려는 개헌안을 2007년 국민투표에 붙였으나 근소한 차이로(반대 51%) 부결됐다. 많은 사람들은 남미의 고질병인 카우딜로가 선거의 탈을 쓰고 되살아 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의 발전과정은 4시대로 구분된다.

(1)석유국가의 탄생(1912~1943)

콜롬비아에 석유가 풍부하다는 사실은 콜럼버스의 탐험 이전(Per-Colombia Era)에 이미 원주민들이 지표로 흘러나온 석유를 아스팔트로 또는 치료제로 이용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시추는 1912년에나 이뤄졌으며, 그 후 얼마 안돼 로열 더치 셀(Royal Dutch Shell)과 록펠러 스댄다드 오일(Rockefeller’s Standard Oil)이 베네수엘라 석유의 주 생산자가 됐다. 그리고 불과 몇 년 후 1929년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2의 석유 수출국으로 부상하게 됐다.

그 결과로 국가 경제는 즉각적이고도 획기적인 영향을 받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경제학자들간에 알려진 더치 병(Dutch Disease: 천연자원의 발견으로 경제에 반 산업화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실제 네덜란드에서 북해 유전 생산으로 화폐가치 상승이 수출감소로 이어지고 생산이 위축됨)에 걸려 들었다. 베네수엘라에서도 그간에 먹고 살던 농업생산이 급감되면서 거의 없어졌으며, 여타의 남미국가와는 달리 온 나라가 석유산업에 파 묻힌 공업국처럼 돼버렸다.

(2)석유국가로서 위치 강화(1943~1973)

1943년 베네수엘라는 탄화수소법을 제정해 석유정책의 대대적인 개혁을 일으켰다. 전에는 정부 수입을 대부분 석유광권세과 관세에 의존하던 것을 개정 후부터는 회사의 석유수입에 따른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게 됐다. 그리고 외국석유회사의 수입은 정부에 내는 세금을 초과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는 특히 중동에서 석유가 과잉 생산돼 유가가 급락해 만성적인 저유가가 지속됐다. 이 문제와 싸우기 위해 1960년에 주요 석유수출국들 특히, 베네수엘라의 재촉으로 OPEC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베네수엘라는 베네수엘라 석유공사를 출범시켜 차후 국유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3)석유붐과 석유산업의 국유화(1973~1998)

1973년 중동의 미국에 대한 금수 조치로 베네수엘라는 1972년부터 1974년 사이에 정부 수입이 4배로 늘어났다. 이같은 정부 수입의 엄청난 증가는 역사적으로 아주 특별한 경우다. 당시 새로 당선된 페레즈(Perez) 대통령은 이제 우리는 수년 안에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1976년 국영석유회사 PDVSA(Petroleos de Venezuela SA)를 설립, 석유사업을 완전히 국유화했다.

석유 붐은 베네수엘라에 크나큰 축복처럼 보였으나 한편으로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역설적이지만 대외 부채가 증가했다.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중반의 OPEC 국가들의 생산쿼터 불이행으로 유가가 급락하는 바람에 베네수엘라의 경제사정은 극도로 악화됐다. 그리고 1998년 유가는 사상 최저가인 배럴당 3.19불(1973년 기준)을 기록해 베네수엘라 경제는 결국 치명타를 입어 1인당 국민 소득은 1980년대 중반부터 계속 감소하게 됐다.

(4)OPEC 재구축과 새로운 국영화(1999~2010)

1999년 집권 초기 차베스는 PDVSA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OPEC에 관해 보다 확고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날 회원국들간에 합의한 OPEC의 생산 쿼터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으며 특히 베네수엘라는 가장 믿을 수 없는 회원국이 돼 있었다.

OPEC 회원국들의 초과생산과 비OPEC 국가인 러시아와 멕시코의 생산확대가 맞물리면서 상당한 공급초과현상이 초래돼 유가는 급락하게 됐다. 차베스는 이를 종식시키려고 2000년 사상 두 번째로 OPEC 국가 원수회의를 카라카스에서 개최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취임 첫해는 OPEC과 비OPEC 국가의 지도자들을 만나 산유국이 생산쿼터를 지켜 저유가를 개선하자고 설득과 종용하면서 보냈다. 그의 노력이 주효해 유가는 1985년 이후 처음으로 27불선을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생산 쿼터를 지키는 문제로 차베스와 PDVSA의 기존경영진간에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경영진은 과거 15년간 OPEC 쿼터를 무시하고 최대의 생산을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베스는 이 마찰을 계기로 삼아 ‘국가 안에 국가’라고 불리던 초국가적인 PDVSA를 자기 구미에 맞게 개편하는데 철저하게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위한 국영화를 이룩했다.

드디어 차베스는 2002년 PDVSA의 역할에 정부의 사회적 중요업무를 추가시켜 국영기업의 업무영역을 넓혀 재정립했다. 따라서 PDVSA는 연간 투자예산의 적어도 10% 이상을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 프로그램에 지출해야만 했다. 이 돈은 2005년에 설립된 국가발전기금(National Development Fund or Fonden)으로 유입 관리돼, 국가예산에서도 제외된 채 집행되고 있다.

이제 차베스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석유회사 PDVSA(1위: Aramco, 2위: Exxonmobil)의 경영권을 장악함으로써 막대한 자금력을 가지고 자기의 정치적, 경제적 야심을 계속 추구하고 있다. 1990년대 베네수엘라는 특수한 유전의 운영을 목적으로 석유산업의 개인투자를 개방하고 전략적 제휴(Strategic Assosiation)로 외국석유회사의 투자를 허용했다.

그 결과 2006년에는 이러한 전략적 제휴 유전의 생산량이 전체의 23%나 달하게 됐다. 그리고 2007년 정부의 주식 비율을 40%에서 60%로 높이기로 했다. 이러한 전략적 유전사업의 추가 지분인수 자금이 수십 억불이 소요되는데도 불구하고 서비스, 농업, 조선, 건축, 산업 등 분야에 걸친 자회사를 7개나 설립했다. 차베스는 국영석유회사를 무리하게 이용해서라도 이 석유왕국(Oil Sultanate)을 발전된 산업국가(Developed Industrial Nation)로 바꾸려는 계획을 가슴속 깊이 품고 있다.

이와 같이 100여년의 석유역사를 가진 베네수엘라는 현재 어느 처지에 있는가?

베네수엘라의 석유매장량은 재래식 원유가 780억 배럴, 오리노코 지대의 비재래식 원유 235억을 합하면 채굴 가능한 매장량은 1015억 배럴이 된다. 그러나 최근 미국 지질협회에서 조사 발표한 바에 의하면 오리노코 지역에서 기술적으로 회수 가능한 원유가 5000억 배럴 이상이 된다고 했다. BBC는 이를 인용하면서 베네수엘라의 석유매장량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2배를 상회할 것이라고 뉴스에 실었다.

그러나 이 비재래식 원유를 회수하려면 기반시설이 크게 부족하고, 국영화 후유증으로 적지 않으며 또 매년 25%씩 줄어드는 기존 유전의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연 30억불을 투자를 해야만 한다. 따라서 비재래식 원유의 생산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석유생산량은 베네수엘라 정부발표와 외부기관의 그것과는 항상 차이가 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하루 240만 배럴이 될 것이라고 최근 OPEC과 IEA가 협의 발표한데 반해 베네수엘라 정부는 약 330만이라고 말하고 있다. 2007년 하루 218만 배럴을 수출해 세계 7위였다. 수출량의 반 이상이 미국으로 수출된다.

확인 매장량은 세계 10위권 이내에 들고, 바로 이 석유가 수출의 80%, 정부수입의 50%, 국민소득의 1/3을 점하고 있다. 따라서 유가와 생산량 변동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실제로 2002년에 차베스를 쫓아 내려다가 실패한 군사 쿠데타와 PDVSA의 2개월간의 파업은 베네수엘라의 경기를 심각한 수준으로 만들었다. 1만7000명의 PDVSA 직원이 해고됐고, 2002년과 2003년 간 국민소득(GDP)은 현저하게 줄어 들었다. 다행스럽게 이듬해 국제유가가 상승해 경기 회복에 큰 도움이 됐다.

차베스의 경제정책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견해는 양분된다. 하나는 막대한 사회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로 차베스가 빈곤층을 감소시켰으며, 실업률이 10% 이하로 지난 10년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높은 물가 상승률을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 미국 보스턴에 있는 광고판
IMF가 발표한 베네수엘라의 물가 상승률은 2008년에 25.7%, 2009년에 31.%로 세계 어느 국가보다 높으며, 이미 설탕, 우유 등 식료품 부족 사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평도 있다. 즉 전 베네수엘라 국회 수석 경제 전문가였던 로드리구에즈는 차베스 대통령 재임기간 중 소득 불평등이 더욱 커졌으며, 유아사망률과 문맹률의 감소에도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미국 외교 문제 월간지 Foreign Affairs에 투고했다.

그러면 PDVSA에서 국가발전기금(Fonden) 명목 하에 국가예산에서 조차 제외된 차베스의 쌈지 돈은 어디로 갔는가? 전문가들은 차베스가 추진하는 사회발전 사업에 사용됐다고 말한다. 한 국제 오일 일간지는 그가 2007년에 무료진료병원, 빈곤층을 위한 식량 지원, 석유산업 외에도 직업 창출, 교육시설 등 사회목적사업에 144억달러를 지출했다고 한다. 또한 석유수입의 증가는 차베스로 하여금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여력도 만들어 줬다. 카리비안 국가에 저유가로 석유를 공급했을 뿐 아니라 2009년 뉴욕시 저소득가정에 난방유지원을 하다가 유가 하락으로 중지하게 됐다. 차베스는 부인했지만 일각에서는 콜롬비아 게릴라와 2007년 알젠틴 대통령 선거자금도 지원했다고도 한다.

베네수엘라는 석유수출을 중단하겠다고 미국을 위협하지만 양국이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리 쉽게 공급 중단을 할 수 없다고 본다. PDVSA는 1986년에 CITCO 주식 50%를 매입하고 나머지는 1990년에 매입해 완전히 소유했으며 9개 정유공장 지분 상당분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석유수요의 11%를 베네수엘라에 의존하며, 베네수엘라는 생산량의 60%를 미국에 수출하는데 이것은 대부분 베네수엘라가 소유한 CITCO와 정유공장에 공급된다.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대미 투자를 감안해 세계은행은 얼마 동안은 베네수엘라가 미국시장에서 계속해 주요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단기간에는 실 이익을 감안해 미국수출을 중단하고 다른 판매처를 구하기 힘드나, 장기적으로 볼 때 베네수엘라는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오히려 위협하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차베스는 중국에 대해 “우리는 100년의 석유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에 기꺼이 공급할 용의가 있다”고 했으며, 중국도 최근 400억불에 달하는 석유 기본시설 차관을 공여하겠다고 했다.

베네수엘라 국민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잔인한 폭군으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으나 개인적 자유확대와 민주적 정부 형태가 그들의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켜주지는 못했다. 볼리바르장군이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좌익 포퓰리즘의 대가인 차베스는 막대한 오일 달러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군부를 유지하고 극빈층을 위한 복지정책을 펴는 동시에 차베스는 자신이 이제 미국으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킨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중남미대륙 전체의 통일(최소한 Gran Colombia)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1만2600달러이며, 2600만 인구 중 30%인 780만명이 하루 2불 이하로 살고 있다. 한 나라의 석유자원 보유는 축복도 아니며, 더욱이 저주도 아니다. 베네수엘라의 역사와 석유산업사에서 보듯이 사람, 즉 지도자와 국민의 수준이 문제이나 외세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스페인의 침략은 몰아 냈으나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한 투자는 아직도 건재하지 않은가?

베네수엘라 석유는 지금도 외국석유회사에게는 검은 황금이고, 과거에는 포악한 독재자의 치부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21세기 사회주의자’가 들어 앉아 욕망과 야심을 성취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제 내년이면 지구종말이 온다는 2012년을 맞이하게 되는데 차베스가 이끌고 가는 베네수엘라호는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지? 우고 차베스에게 정중히 묻고 싶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1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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