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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Ⅴ]

우리는 이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Ⅴ]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1.07.0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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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석유 국제 컨소시엄이 이란에서 최초로 결성됐다.

이란의 석유산업은 국유화 후유증으로 3년 동안이나 시달리다가, 1954년 이란 쿠데타정부가 마침내 컨소시엄계약에 서명을 했다. 이란에서 최초로 국제적인 석유컨소시엄이 탄생한 것이다. 이 계약은 네덜란드 법에 따라 체결, 이란에 등록됐다. 컨소시엄 회원은 4개국에서 16개회사가 아래와 같은 지분비율로 구성됐다.

미국 5개사 중 걸프를 제외한 4개사는 아람코(Aramco: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개발)의 파트너이고 걸프, 쉘, CFP 등은 쿠웨이트에서 석유를 개발하고 있었다. 이 회사들은 이란원유가 국제원유시장에서 제외됐던 3년간 다른 지역에서 생산량을 증대시켜 부족분을 채웠다. 때문에 이란원유가 시장에 재 진입하려면 여타 지역에서 생산량을 줄여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 컨소시엄에 참여하게 됐다.

컨소시엄의 확립은 석유산업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광구개발권은 외국인이 소유한다는 개념에서 처음으로 협상과 합의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대체됐다. 멕시코에서는 정해진 수탈방식이었으나 이란에서는 모든 당사자가 인지하고 원칙적으로나마 처음으로 석유자산이 이란에 귀속된 것이다. 즉 이 새로운 거래형태 아래 이란은 국가석유자원과 시설을 소유하게 됐으나 이는 명목상에 불과해 실제적으로는 컨소시엄에 아무 지시도 할 수 없었다. 이 컨소시엄은 운영대행계약회사로, 이란의 석유산업을 운영해주고 그 생산물을 지분대로 분배 받아 각자의 시장에 판매했다. 컨소시엄 운영권자의 권한은 전보다 축소됐지만 단일 회사로서 최대 지분 40% 보유한 AIOC가 운영권자가 됐다.

이란입장에서 보면 이 컨소시엄계약은 수개월전 처칠과 아이젠하워가 공동으로 모사데크에게 제의한 조건보다 훨씬 불리했다. 어찌됐던 초기 3년간은 생산이 계속 증가해 국유화 전 수준까지 도달했고, 유전 규모도 가시사라란, 아와즈 및 아가잘까지 개발이 확대 됐다.

석유법안 및 신규계약

컨소시엄계약체결 3년 후인 1957년 이 컨소시엄이 관장하는 이외의 지역에서 외국투자가 석유광구 개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석유사업법이 새롭게 제정됐다. 그 참여 방법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많은 국제석유회사의 불만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적으로 태도를 바꿨다. 산유국에서 석유사업을 계속해서 추진하려면 이러한 방법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방법임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란 석유개발 참여 조건은 원칙적으로 50:50이다. 즉 50은 이란국영석유회사 몫이고 나머지는 외국회사의 몫이다. 그런데 외국회사의 몫 50%는 이란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실제 배분 비율은 75:25이다. 그 후 세금액수가 증가해 이란의 최종 배분률은 85%까지 증가됐다. 또한 외국석유회사는 또 다른 로열티를 이란국영석유회사에 지불해야만 했다.

광구도급계약(鑛區都給契約: Service Contracts)

1957년에 제정된 석유사업법은 1974년 개정됐다. 이에 따라 외국석유회사는 석유 탐사, 유전개발, 석유생산 즉, 상류부문(Upstream)에 대한 도급계약만이 가능했다. 천연자원의 소유권을 산유국이 보유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외국회사는 석유생산활동에 참여해 석유지분을 직접 소유 할 수 없고 다만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탐사, 개발, 생산 활동을 도급 맡아 대행해 주고 작업비용과 투하자본 및 이익금 등 그 대가는 생산 원유로 수년에 걸쳐 회수한다.

환언하면 만약 청부계약에 따른 청부업자가 상업적인 유전을 개발하지 못하면 지출한 비용을 강제로 받아낼 수 없다. 그러나 사업적인 석유를 발견하면 그 소유권은 이란국영석유회사에 귀속되고 도급회사의 비용은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을 받게 되는데 그 방법은 회사가 매입하는 원유 대금에서 감해준다.

이슬람혁명과 계약의 종료

1954년에 체결된 컨소시엄계약은 1974에 개정, 새 계약으로 대체됐다. 이란을 포함한 회원국에 의해 운영되는 석유수출기구(OPEC)는 외국회사에게 보다 많은 제한을 가했다. 1970년대 석유개발권을 보유했던 대부분의 외국회사는 도급계약자로 전락됐다. 조세 부담률은 50%에서 80%로 증가했고 로열티지급은 12.5%에서 20%가 됐다. 원유가격도 OPEC이 결정했다. 때문에 외국석유회사에 남는 돈은 22센트에 불과해 컨소시엄 회원사들은 가능하면 원유를 많이 뽑아내서 수출을 늘려야만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또 하루 30만배럴의 원유를 정제해 제품을 수출해야만 했다. 이외에 40%의 자본비를 원유 생산 착수금조로 NIOC에 지불했다. 회사는 또 5년간 원유 생산에 필요한 기술용역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이렇듯 OPEC 결정에 따른 제반 조치 사항은 회사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1954년 컨소시엄계약체결 후 조건이 점점 어려워져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상태가 되자 협상을 재개, 조건 완화를 기하려고 했다.

조건 완화를 위한 협상은 1976년 시작됐으나 이슬람혁명의 발발로 합의를 보지 못했다. 결국 이맘 호메이니의 지휘하에 승리한 이슬람혁명으로 NIOC는 혁명위원회 결정에 따라 혁명 이전에 체결한 기존의 모든 외국회사와의 계약을 종료한다고 선포했다.


이슬람혁명 후 석유산업

이란 석유산업 종사자들은 혁명운동에 적극 가담하며 파업을 자행해 석유 생산이 자주 중단됐다. 외국석유노동자들이 국외로 추방됨에 따라 불가피하게 이란 종업원이 탐사, 시추, 개발, 생산, 수송, 정유 등 석유산업의 일관작업을 떠맡게 됐다. 국제전문가들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이란석유산업을 성공적으로 인수 운영함으로써 이란 종업원은 자신들의 능력과 전문성을 입증했다.

1980년 9월 21일 이란-이라크간에 강요된 전쟁이 발발해 석유, 가스, 석유화학 등의 산업시설이 공중폭격 및 지상포격의 주요 대상이 됐다. 도시, 산업단지 및 전선(戰線)에 연료공급을 저지하고 원유의 생산과 수출을 중단시키려고 집중 공습이 계속됨에 따라 이란의 기간산업인 석유산업은 치명타를 입었다.

이라크의 공습으로 아바단 정유공장은 파괴됐고, 다른 정유공장도 여러 번 공습을 당했다. 카그섬 및 여타 수출용 원유 저장소는 집중포화의 목표가 됐다. 석유산업을 완전히 파괴시킬 기세로 강력한 포격은 계속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유수출은 단 하루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 나중에는 수출을 저지하려고 생산정(生産井)과 생산 플랫폼도 공격목표로 삼았고 나아가 유조선에까지 공격을 시도했다.

수 천명의 순직자, 포로와 기술자들의 희생이 따르긴 했지만 석유성장관을 중심으로 석유산업 근로자와 전문가들은 심혈을 기울여 원유생산, 정유, 수출 등 산업시설을 보호하고 공습으로 계속 파괴되는 시설을 끈질기게 복구했다. 그들은 혁신적인 계획을 차근차근 실천하면서 적국의 음모에 맞섰다. 그 결과 이란의 기축산업은 유지됐고 국가와 국민, 군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전후 복구 및 발전 캠페인

전쟁의 고비를 넘긴 이란 혁명정부는 산업재건과 쇄신에 노력을 경주해 정유 및 원유 생산 수출에 있어 전쟁 전 수준을 넘겼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이란에 대한 금수조치에도 불구하고 석유성은 석유산업 발전계획을 추진했다. 석유산업발전계획은 다음의 5가지 주요 정책에 따라 추진됐다.(하단 박스 참조)

이렇게 함으로써 최근 이란 석유산업은 각 분야에서 큰 업적을 달성 할 수 있었고 성장 발전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 그림2. 남부 파알스 가스전.
8단계 남부 파알스 가스전(The 8 phases of South-Pars fields, 사진 #2) 개발을 포함한 원유 및 가스전 확장을 위해 외국자본을 유치하려고 각기 다른 계약형태를 가지고 협상했다. 그리고 석유화학 산업은 혁명 전 50만톤 생산에서 1200만톤으로, 정제능력은 70만톤에서 170만톤으로 각각 증가됐다. ‘석유화학 경제지역’이 형성되고 파알스 경제 에너지 특구가 설정돼 370개도시 650만가구에 가스공급을 위한 가스 수송관로가 연결됐다. 상당수의 고압가스 관로가 부설됐고 전례 없이 가스처리량과 수송량이 증대했다.

이슬람혁명 성공 후 수년 동안은 특히 석유산업은 괄목할 만한 발전과 변화를 했으나 미국의 경제 제재가 지속됨에 따라 석유산업의 시설들이 노후 되고 외국자본의 유입이 단절돼 상당한 애로를 겪고 있다.

이란은 왜 고전을 면치 못하나

카자르왕조는 무능하고 사치스러워 부패할 때로 부패해저 각종 이권을 외국에 헐값에 내줬다.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에게 빼앗기고 아프카니스탄의 권리는 영국에 넘겨 주는 등 정부는 부패와 외국의 조정으로 혼란스러웠으며 모든 외국인은 치외법권을 누렸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를 벗어 나는 길은 모든 권한과 이권을 법규화 하는 길만이 가능하다고 봤다. 이로 인해 1905년 헌법혁명이 시동을 걸게 됐다. 의회를 구성하고 1906년 10월 7일 제헌국회를 개원해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혁명은 이슬람세계에서 발생한 최초의 대중운동이었다. 이 혁명은 지난 세기 이슬람역사를 형성시킨 모든 정치적 사회적 풍조를 모두 수면위로 떠올렸다. 즉 민족주의, 범이슬람주의, 이슬람지도자 집단의 역할, 국제적인 경제 세력의 침투, 식민지주의, 외국의 음모와 내부폭정 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19세기 말엽 이란은 러시아(곰의 발톱)와 영국(사자의 입) 사이에 끼어 자유롭게 운신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란은 지정학적으로 볼 때 페르시아만과 지중해에 진출하려는 러시아 부동항 확보정책의 걸림돌이며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인도양을 지배하려는 영국 정책 수행의 중요한 길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강대국은 이란과 같은 좋은 먹이감을 놓칠 리가 없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 이란을 군사적·경제적으로 침탈했다.

헌법혁명도 초기 의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공포했으나 무능하고 사치에 빠진 카자르 정부는 러시아의 세력을 업고 권력을 유지하면서 국회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카자르 정부의 재정은 제로 상태로 군인과 공무원의 월급도 줄 수 없으며 외채 채무불이행사태가 수차 발생했다. 심지어 차관 도입에 필요한 담보로 도입 물품의 관세 징수권을 내놓기도 했으며 국내 조세권도 입찰에 부쳐 고액 낙찰자에게 줘 수탈이 극심해졌다. 이 와중에도 왕은 차관을 얻어 호화판 외유를 하려고 돈을 구걸했으나 모두 외면하고 러시아의 루불을 겨우 꿔서 호화판 외유에 탕진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세기 초 근대화를 이룩한 국가들은 제국주의 건설을 위한 거대한 세계 식민지 게임을 벌였다. 결국 사자와 곰이 싸우다가 전쟁보다 오히려 협상으로 나눠 갖는 것이 이익이 크다는 점을 깨닫고 이란을 3등분해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영국이 나눠 실질적인 지배를 했으며 중앙은 영국지역과 러시아 지역으로 나눠 놓고 이란에 명목상의 통치권을 줬다.

1907년 12월 15일 샤와 마자리스 간 대립 격화가 심화되자 샤는 코사크 대대로 하여금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국회의원을 무차별로 검거했다. 지방의 단체들은 들고 일어나 테헤란에 집결, 코사크 군대와 대항했다. 쇄도하는 저항 세력에 샤는 코사크 군대를 철수시키고 헌법에 따르겠다고 코란에 맹세했다. 마질리스와 군주간의 대치 상태가 끝나고 교착상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 휴전에 불과해 대립의 골은 깊어만 갔다. 여기에 샤의 편을 드는 영국과 러시아는 양쪽을 종용하면서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러시아 정보원이 테헤란에 공포를 조작해 놓고 이틈을 타 샤를 러시아군대의 보호하에 왕궁에서 교외 인근에 있는 ’임금의 정원‘으로 피신시켰다. 곰의 재주는 한계가 있었는지 구 한국말 서울에서 일어난 아관파천과 아주 흡사했다. 샤는 사태를 논의하자고 국회의원들을 초청해놓고 이들을 체포해 버렸다. 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러시아 장교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국회에 대해 무리한 요구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계엄군은 국회와 법원을 점령하고 다수의 요인을 검거하는 등 완전히 테러를 감행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국익에 따라 결국 이란의 헌법혁명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샤는 번번히 국회를 유린했고 외세에 의존했다. 러시아는 이란 남부에서 올라오는 이란군대의 진격을 멈추지 않으면 군사 개입을 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정신적 수도인 쿰을 지나 테헤란에 입성했다. 코사크 군대의 치열한 저항을 받았으나 결국 코사크는 항복하고 물러났다. 샤는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했다. 1909년 7월 16일 점령군 지휘자들, 살아 남은 국회의원, 종교지도자들이 모하메드 알리 왕을 물러나게 했다.

헌법혁명의 최초 발단은 1891년 담배 이권(연초매입, 제조, 판매 등)을 영국인에게 헐값에 팔아 넘긴데서 비롯됐다. 18년만에 전제 군주인 샤를 제거하게 된 것이다. 또 이 혁명은 1954년 민족주의 모사데크 운동의 징후가 됐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추진력을 실어줘 1979년 이슬람혁명이 일어 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무능하고 사치스러운 왕조가 식민 제국주의의 거센 물결에 휩싸여 허우적대면서 구조대를 자국민에게서 구하지 않고 바로 침략의 물결을 일으킨 곰에게 의존했으니 18년이란 세월을 혼란 속에서 내줄 것을 다 내주면서 피폐한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레자 칸은 추진력 있는 지도자로서 중앙정부의 권위를 세우는 한편 뒤떨어진 이란의 근대화를 위해 백색혁명을 주도했다. 토지개혁을 실시해 지방의 지주계급을 없애고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팔레비 왕조의 기반을 닦으려 했다. 그 밖에도 20여개에 달하는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으나 정부와 공무원의 한계, 성급한 조치, 무리한 재원 조달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부작용이 커지자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 주는 조건으로 강제 퇴위 당했다. 결국 근대화는 실패했다.

모사데크는 국회의 신임을 받아 두 번이나 수상 직을 역임하면서 석유 국유화를 주도했으나 역시 영국과 미국이 공산주의자로 몰면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면 모사데크 정권을 축출해야 된다며 두 번에 걸친 쿠데타로 몰아 냈다. 민주주의, 인권, 내정간섭 등은 모두가 구실과 핑계였으며 정의를 위하는 처사는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국익에 따른 자국의 영화를 구하려는 길만 있을 뿐이었다.

1954년에 결성된 국제 석유컨소시엄은 미국과 유럽국가들의 석유 제국주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악명 높은 달시 석유계약에서 시작해 16개 회사 석유 연합군이 이란을 점령했다. 그리고 세계 1, 2차 대전의 연료를 공급한 대가로 돌아온 것은 빼앗긴 영토와 불리한 석유계약뿐이었다. 유대인들은 세계를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한바 없으나, 2000년 동안이나 팔레스타인의 삶의 터전을 왜 빼앗아 유대인에게 주었는가? 이스라엘은 중동국가의 공동의 적이 됐다. 특히 이란과는 견원지간이다.

현재 이란은 이슬람혁명을 성공시켜 모든 외세를 몰아내고 불리한 해외 계약을 폐기했지만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어 여력이 없는지 이란 침공은 말만 무성하지 실행에 관해서는 전문가 의견이 분분하다. 지난 4월 이란에서 석유산업 박람회가 개최됐으나 단골인 BP나 쉘도 불참했고 불이익을 무릅쓰고 참여 할 것이라는 미국 회사도 참여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대타로 중국의 수십개 회사가 참여해 투자를 약속했으나 이란은 국제석유회사의 대규모 투자를 원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석유생산시설, 정유공장, 탐사 시추시설 등이 노후화 됐고 새로운 기술의 결여로 석유나 가스 증산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역사는 찬란한 페르시아 문화를 이룩했고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며 여러 번의 외세 침략에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의 갈등으로 국제사회와 고립된 상태다. 미국이 이란을 압박·견제하는 것은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 중동정책의 핵심은 석유와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이란은 이 두 가지 모두 해당된다. 이라크가 무너진 마당에 이란이 중동의 패권국가로 올라서는 것은 이스라엘 때문에 좌시할 수 없다. 석유와 이스라엘 문제가 엉킬 때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더 중요시했다. 그 이유는 미국의 말을 잘 들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해 줬고 지난 30년간 8번이나 미국을 도와줬다.

근대화에 실패하고 석유자원을 국내 경제 발전과 연계시키지 못하고 이슬람혁명을 성취했으나 외세의 압력은 보다 강해지는데 종교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어 삶은 어려워지고 있다. 제국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거대한 외세로부터 벗어 나기 위한 힘을 기르려고 하나 지난 역사에서 그러하듯 가만히 놓아 두질 않을 것이다. 이 침략자들의 국익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이란은 그 외교노선을 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이란 경제제재의 실효성

미국은 이란의 우라늄 농축사업을 중단시키려고 수 차례에 걸쳐 경제제재 수위를 높였다. 그러나 이란은 국가적인 타격을 받으면서도 그 사업을 중단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란은 현재 대규모 해외 투자 중단, 휘발유 금수 조치, 금융제재, 기업과 국가의 상거래 중지 등으로 원유생산이 줄고 있어 OPEC내 위치가 흔들리며 세계 제1의 가스전 개발이 늦어지는 등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한층 더한 포괄적 제재를 가해 이란에 경제적 부담은 주고 있으나 이란정부는 친 이란 정부와 연계해 이 부담을 어렵지 않게 감당해내고 있다.

미국이 우위에 있는 G7 이외 떠오르는 BRICs 블록(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세계적으로 외교, 경제 등에서 떠오르고 있음)은 최근 대 이란 경제 제재를 너무 가혹하다면서 반대 의견을 같이 했다. 브라질은 현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이며 순번제로 하기 때문에 다음은 레바논이 될 것임으로 또 터키가 이사회 회원으로 추가된바 이 제재를 반대하는 입장이라 오바마는 추가적인 경제 제재 결의안을 받아낼 수 없을 것이다.

금융제재도 큰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지난 2009년 3월부터 1년간 45만톤의 석유 제품의 90%를 구 소련의 연방 국가들(아제르바이젠,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멘스탄, 카자크스탄)과 10%는 이라크와 맞교환 했다. 이것은 이란이 국제 은행을 거치지 않고 휘발유를 수입할 수 있다는 길을 보여준다. 미국 정부가 이란과의 거래를 막아도 이러한 주변국가를 통해 암거래를 할 수 있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 기업과 부패한 정부는 언제나 있기 마련, 암시장을 만들어 떼돈을 벌려고 한다. 이와 똑같은 일이 이라크 경제 제재 때도 일어났다. 실제로 필자가 바그다드로 광구 협상을 가는 길에 요르단으로 가는 대형유조차를 봤으며 요르단의 자동차가 휘발유를 이라크에서 넣는 것도 봤다. 밀수와 암거래는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

다른 몇 가지 상품들은 휘발유보다 쉽게 거래되고 있다. 휘발유 금수 조치는 미 의회에서만 인기가 있을지 모르나 공상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이란과 직거래를 하던 러시아의 루크 오일은 철수했으나 중국의 차이나 오일(China oil)은 휘발유 60만배럴을 직접 판매했으며 시노팩(Sinopec)과 또 다른 대형석유회사가 휘발유 직판을 재개하려고 준비 중이다. 로이터 통신은 “돈이 벌리고 경제적 이득이 크다면 이란은 언제든지 국제 시장에서 휘발유 판매자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한 상인은 ”정치인들은 시장생리를 모른다. 제재는 추녀에게 화장을 해놓고 미녀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경제 제재의 실패를 요약하면 직접구입이 안되면 간접구입을 하고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밀수와 암거래로 해결된다.

더욱이 이란은 5억1200만불을 들여 독일회사가 정유공장을 건설 중에 있고 기존의 공장을 확장하기 때문에 2012년에는 해결된다. 이란은 스위스 회사와 130억불에 해당하는 가스공급계약(계약기간 25년)을 체결했다. 금융 제재도 UAE의 은행 파트너들과 베네수엘라 합자은행을 통해 아직까지 잘 피해나가고 있다. 경제 제재로 한 국가를 변화 또는 개조시키기는 아주 어렵다고 본다. 미국은 90마일밖에 있는 작은 섬나라 쿠바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석유 가스 대국이며 지구 반대편에 있는 7000만 인구에 프랑스, 독일과 스페인을 합친 크기의 이란에게 효과적인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최후 수단인 무력침공은 어떠한가?

‘거대한 사탄’과 ‘이슬람파시즘’의 대치

▲ 그림3. 호르무즈 해협의 유조선 해로.
앞에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중동에 대한 미국의 관심사는 두 가지뿐이다. 이스라엘과 석유자원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중 우선권은 언제나 이스라엘에 있다. 미국의 대 중동 정책의 양 축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요르단 등 친미파 국가들이다. 그런데 미국이 ‘깡패 국가’라고 부르는 이란은 엄청난 석유 가스자원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세계석유 공급량의 1/5이 통과하는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폭이 50㎞, 깊이 190m)을 가지고 있다. (사진 #3)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은 반미국가로 선언하고 미국의 중동정책을 거부해 왔으며, 미국 또한 1979년 11월 미대사관 인질사건 이후 1980년 4월 7일 이란과 국교를 단절한 이래 ’악의 축‘과 ‘거대한 사탄’ 사이가 지속되고 있다. 이란은 미국 중동정책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라크 침공 이후 현재 중동에서는 시아파가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라크에서도 시아파정권이 수립되고 레바논에서는 헤즈볼라가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란 역시 대표적인 시아파 국가로 이라크와 헤즈볼라와 함께 시아파연대를 구축하고 있다. 이란은 시리아와 함께 반미전선을 구축해 친미 수니파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처럼 이란은 대표적인 반미 국가로 미국의 중동 질서 재편에 반대하고 있다.

2009년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이란을 방문해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과 만나 쌍무협정을 체결한 후, 전 세계에서 반제국주의 전선을 확대해 나갈 것임을 강조하면서 두 나라의 반미연대를 과시했다. 그리고 두 나라는 에너지 분야에서도 세 개의 양해각서를 체결, 베네수엘라는 이란에 휘발유를 수출하고 상호간에 석유개발 투자를 하기로 했다. 반미 국가이자 산유국인 이란과 베네수엘라의 이 같은 연대는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가스 OPEC을 제안하고 PetroEuro도 주장한다.

미국의 군사공격과 이란의 대응

이란은 미국이 핵 개발을 빌미로 공격할 경우 우선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고 위협하면서 그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국제 여론을 조성, 공격의 부당성을 선전할 것이다. 이란은 우라늄처리가 핵 발전 연료를 얻기 위한 평화적인 것이라며, NPT(핵확산금지조약) 틀 내에서 평화적 목적을 위한 우라늄처리와 농축은 허용돼 있는 만큼 자국의 핵개발계획은 합법적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미국의 대 이란 공격의 진정한 목적은 이스라엘을 중동 세력에서 보호하고 미국이 에너지 패권 전략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란은 역사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곳에서 군사 작전을 전개해 왔다. 그리고 이 곳을 통제하기 위해 정예부대인 이슬람 혁명수비대의 해군조직(IRGCN)을 재정비 했다고 워싱턴포스트지가 미 해군정보국의 보고서를 인용 보도했다.

▲ 그림4. 샤하브 미사일 3.
2003년 7월 7일 이란은 유효탑재량 1.2톤, 사정거리 약 1300㎞의 중형탄도미사일인 샤하브3 (Shahab3: 이북의 노동 1호기를 기초로 발전시켰음. 사진 #4)을 실전 배치했다. 이 미사일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이란이 중동 지역에 있는 미국의 모든 동맹국들을 공격할 수 있는 운반 체계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터키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로, 중동의 군사 지형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중동에서 미국의 동맹국과 그곳에 배치된 미군에게 직접적인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 둘째 샤하브3 미사일이 대량살상무기 운반을 위해 고안됐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2008년 7월 이란은 기동 훈련 중 샤하브3b(사정거리 2000㎞) 중형 탄도 미사일을 포함해 미사일 10기를 시험 발사하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을 긴장시켰다. 이와 같은 중형미사일의 개발은 핵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도는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초에 이란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의 후원으로 핵개발을 시작했다. 하지만 혁명 이후 이란의 핵개발은 중단됐다가 이란-이라크 전쟁 중 스커드 미사일의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자 공격 및 방어를 목적으로 스스로 무장할 필요를 느껴 핵 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이란은 핵 문제를 1950년대 모사데크의 석유민족주의 운동과 연결시켜 핵 민족주의 운동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NPT 하에서 평화적 핵 에너지 개발을 추구하는 것은 주권국의 당연한 권리라면서 핵 문제를 이란의 주권과 결합시켜 주권론에 의한 핵 민족주의 운동을 표방하고 있다. 주변국인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 등은 핵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이슬라엘을 지도상에서 없애거나 유럽으로 옮겨야 한다‘고 해 국제사회에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경솔하고 경험이 부족한 지도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으나 실제로는 철저한 의도와 목적이 있는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즉 만약 미국이 군사 공격을 감행 할 경우 이것은 이란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는 명분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미국의 이란 제재는 다양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지역적·국제적 동맹을 강화해 이란에 대한 이중봉쇄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봐와 같이 이란은 아직까지 잘 버티면서 힘을 기르고 있다. 둘째 4번째 제재인 ‘포괄적 제재’는 이란의 경재를 약화시켜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이란이 협상에 응한다 해도 미국과 유럽의 입장이 다르고 이란과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하는 협상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날 것이다. 셋째 미국의 선거를 위한 국내정치용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11월 2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란에 대한 강경 노선을 표방해 미국의 보수파에 대한 반발을 사전 예방해 보려는 것이다.

오바마는 선거 공략에 따라 이라크에서 상당수의 미군을 철수 시켰으며 최근에는 빈 라덴 사살 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철수를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이란을 새롭게 공격해 겨우 수습해 놓은 양국 사이에 끼어 든다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이란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다르다. 호르무즈가 봉쇄돼 명약관화한 세계경제 파탄은 누가 책임을 지며, 이란 공격의 전비는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미국정부 재정은 하반기에 어떤 조치 없이는 부도 상태가 된다.)

이란 제재로 최대의 수혜국인 중국이 유엔에서 누구 편을 들겠는가? 미국도 커져가는 이란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제 군사공격 밖에는 없다. 물론 이스라엘을 시킬 수도 있겠으나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가. 섣불리 나서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초 이란의 공격은 올 상반기 중에 있을 것으로 점쳤었다. 미국도 이미 대 이란 군사공격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행은 여러 가지 여건을 감안해 볼 때 올 하반기에 있을 법한데 그것도 조지 부시 같은 대통령이 나와야 가능할 것이다. 이란은 역사적으로 알렉산더, 몽고 등 당시 최대 강대국의 침략에도 살아남아 오늘날 초 강대국과 맞서고 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펄 벅 여사의 소설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 있다‘가 뇌리를 스친다. 이란은 살아 있다.

석유산업발전계획

1.석유화학사업을 확장해 세계시장에서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내수산업 계열사들이 필요로 하는 원료 공급을 기한다.
2.가스 공급망을 확장해 산업단지, 발전소, 주거지역을 연결함으로써 경제적이며 공해가 없는 에너지를 활용하고 원유 수출을 늘린다.
3.석유산업 상류부문에 투자해 석유 탐사 개발을 강화하고 OPEC 내에서 제2의 석유 수출국과 세계 제2의 가스 보유국 지위를 유지한다. 아자데간(Azadegan), 타브낙(Tabunak), 하마(Hama) 등의 대형 유전의 발견은 이러한 투자의 결과다. 
4.OPEC 및 국제무대에서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세계석유시장의 안정을 추구한다.
5.개발사업의 소요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바이백계약(Buy-Back Contract: 국제석유회사가 돈과 기술을 가지고 유전을 개발해 NIOC에 운영권을 인계하고 투입자본+이자+위험부담을 감안한 투자비보상/RF; Remuneration Fee)을 통해 실질적인 투자유치와 국내전문가 활용, 외국회사로부터 기술이전을 도모한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2011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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