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리비아의 국운(III)

리비아의 국운(III)

  • 기자명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 입력 2011.10.04 13:44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비아의 석유발견

리비아의 천연자원은 1551년부터 1911년까지 360년간 터키제국이 장악했었다. 그 후 1942년까지 30여 년간 이탈리아 식민지하에 있으면서 얼마간의 지질조사가 이루어졌다. 2차 대전 후 1951년 독립하기까지 신탁통치를 하던 영국 정부가 조사를 계속했다. 리비아는 석유가 발견되기 전에는 경제발전의 여지가 없던 나라였으며, 단지 1, 2차 대전 시 격전지였을 뿐이다.

이 광대한 사막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과 영국군의 수 천대의 탱크가 공방을 거듭했던 장소였다. 그리고 사막의 여우 롬멜도 고질적인 연료부족으로 사투를 버리다가 이곳에서 전멸됐다. 양측 군대, 특히 독일군대는 연료가 바닥이 나 이를 확보하려고 전력을 다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단지 160km 떨어진 곳에 세계적 규모의 엄청난 석유가 묻혀 있었다.

리비아는 가뭄과 메뚜기 떼에 시달리는 아주 가난한 나라였다. 2차 대전 후 수년 동안 수출 이라고는 에스파르토(Esparto, 풀의 일종으로 화폐용지 원료)와, 연합군과 독일군이 버리고 간 탱크, 트럭, 무기 등의 전쟁 폐기무인 고철뿐이었다.

그러나 1950년 중반 지질학자들은 리비아에서도 석유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리비아 정부는 석유탐사와 개발을 촉진하고자 1955년 석유사업법을 제정하였는바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과는 달리 광구를 소규모로 나누어 보다 많은 석유회사의 참여를 유도했다. 특히 타 지역에 유전이 없으며, 메이저가 아닌 독립계열 석유회사를 대거 참여시켜 탐사와 광구개발을 지체없이 최대한 빨리 진행하려고 했다. 그리고 정부 몫의 원유 가격을 공시 가격이 아닌 그보다 낮은 시장가격에 연동 적용하여 석유회사 고수익을 보장해 줌으로써 생산량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당시 리비아 석유성 장관은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하면서 ‘우리는 석유를 최대한 빨리 발견 생산하고 싶다’라고 한마디로 말했다.

이 같은 전략은 적중했다. 첫 번째 광구분양입찰에서 총 84개 광구에 17개 석유회사가 응찰해 입찰은 성공적이었다. 이와 같이 리비아 정부의 영향력은 발휘가 됐으나, 당시 리비아는 아주 낙후된 국가로서 국제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미국에 통화하려면 로마로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지질학자들은 전례 없던 장애물을 만나 작업의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 장애물이란 다름아닌 2차 대전 때 양측에서 매설한 300만여 개의 지뢰였다. 지질학자와 현장 노동자들은 제거되지 않은 지뢰 폭발로 사상자가 생겼다. 석유회사는 지뢰탐지 및 제거 반을 구성하고, 롬멜장군 휘하에서 지뢰를 매설했던 독일공병 출신까지도 고용했다.

리비아에서의 초기 탐사 결과가 실망스러워지자 회사는 맥이 풀렸다. BP는 재고 물품을 처분하고, 임대 장비를 해약하기 시작했다. 종사자들도 사택에서 퇴거 준비를 했다. 그런데 1959년 4월 지중해 연안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젤텐(Zelten)이라는 곳에서 뉴저지 스텐다드 석유회사가 큰 유전을 찾아냈다. 미 국무부성은 ‘리비아에 잭팟이 터졌다’라고 영국 외무성에 알렸다. 그러나 사실은 뉴저지사도 리비아 사업을 거의 포기하려는 시점에 있었다. 이 석유회사는 사우디 아람코(ARAMCO)사의 지분 30% 보유, 이라크석유회사와 이란 컨소시엄의 회원이며, 베네수엘라의 최대 생산자인데 여기에 더해 이 대발견을 했으니 중단없는 석유 공급 능력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리비아는 중동이나 베네수엘라보다 정치적으로 안정됐고, 특히 리비아석유는 중동석유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젤텐 석유 발견으로 참여회사들은 모두 서두르기 시작했다. 1963년까지 10여 개의 좋은 유전이 개발되어 수출이 시작됐다. 유황분이 적은 아주 질이 좋은 경질 원유였다(유황함유 0.5% 이하 및 API 37 이상). 따라서 휘발유 회수율이 높고, 환경오염이 적은 제품 생산이 가능했다. 또한 리비아 석유는 수송에 있어 아주 유리했다. 번거로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않아도 되고, 저 멀리 케이프타운을 돌 필요가 없었다. 다만 짧은 항해로 지중해를 건너기만 하면 이탈리아 정유공장에, 또는 남부 프랑스에 쉽게 도달할 수가 있었다. 1965년까지 리비아는 세계 6위 석유수출국이었고. 세계 석유수출량의 10%를 차지했다. 1960년대 일일 생산량은 300만 배럴이상 이었고, 1969년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생산량을 초과했다. 10년 전만해도 석유와 전혀 무관 하던 리비아의 이러한 성취는 가히 괄목할 만한 일이다.

리비아 석유산업은 예기치 못한 급성장을 이룩했으나 사업 환경은 부패 일색으로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리비아 사람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상당한 돈을 요구했고 들어주지 않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애를 먹였다. 장비를 제때 확보하려면 세관에 연줄이 있는 대리점과 계약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통관은 한없이 늦어진다. 주요 이권 사업은 어느 왕족 일가가 맡아서 운영하는데 그 왕족이 죽으면 그 사업 승계자가 결정되기 전에는 누구에게 뇌물을 주어야 일이 되는지 알 수 없다.

대량의 리비아 석유의 극적인 시장출현은 수에즈운하의 개통으로 하락 추세의 유가를 더욱 부추겼다. 리비아 석유생산량의 반 이상이 중소규모 독립계열의 석유회사가 보유하고 있으나 메이저와는 달리 자체 판로가 없었다. 이 독립계열 회사는 대체 유전이 없기 때문에 리비아 유전에서 생산을 제한 할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미국이 자국 내에 고유가 보호를 위하여 수입 쿼터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미국에도 팔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리비아석유는 정치적, 경제적, 지리적 등의 이점을 두루 갖춘 유럽시장에 몰릴 수밖에 없어, 값은 고하 간에 무조건 팔 수 밖에 없었다. 유럽에 팔고 남은 원유는 세계도처로 시장을 찾아 헤맸다. 수요를 초과한 석유공급은 그 시장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결과 아주 치열한 가격인하 경쟁이 시작됐다. 1960년과 1969년 사이 유가는 22%나 하락하여 배럴당 36센트가 됐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더 가파른 하락세로 40% 이상 떨어졌다. 원유는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어디서나, 항상 지불하려는 아주 낮은 가격으로 구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원유시장은 푹 고꾸라졌다.’

비아의 석유회사 압박

오늘날 몰락한 카다피의 집권 초기와 그 후 국제석유회사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알아보면 리비아 석유가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카다피와 그 동료들은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저서 ‘혁명의 철학’과 ‘아랍의 소리’ 방송에 고무되어 일찍이 고등학교 시절 십대 때부터 음모를 시작했으니 만 10년 전에 이미 혁명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과 주의(主義)를 나세르를 본받았다. 또 이들은 권력에 이르는 길을 정당이 아니라 나세르가 했던 방법과 같이 육군사관학교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 집단은 나세르와 나세르식 아랍통합의 비전에 억매여 있었다. 카다피는 나세르를 닮은 타고난 음모자에다가 조울증이 있으며, 별나고 엉뚱해 스스로 아랍의 화신이 되려고 했다. 그렇게 되려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시오니즘, 다른 아랍국가와 서방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적대감정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석유 수입을 가지고 세계도처에 있는 테러리스트들에게 은행가, 후원자, 경리관의 역할을 자행했다.

9월 혁명이 성공하자 카다피는 혁명 명령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첫 조치로는 리비아 영토 내에 영국과 미국의 모든 군사기지를 폐쇄하고, 수많은 이탈리아인의 추방이었다. 그는 또 리비아 내에 있는 모든 성당을 폐쇄하고, 십자가 철거명령을 내리고, 그 안의 물품들은 경매에 붙였다. 1969년 12월 카다피는 반 쿠데타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권력을 한 손에 잡자 다음은 석유산업을 손대기 시작했다. 1970년 1월 혁명명령위원회는 석유공시가격의 인상을 요청하면서 석유산업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카다피는 21개의 리비아 외국석유회사 사장들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필요에 따라 생산을 중단시키겠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5000년 동안 석유 없이 살아온 민족이 정당한 권익을 위해 몇 년을 못 참겠는가?”라고 위협했다.

처음에는 에소-리비아(Esso-Libya)사에 압력을 가했다. 카다피 군사정권은 공시가격을 배럴당 43센트를 요청했다. 당시로서는 이러한 유가인상은 터무니없는 요청이었다. 에소가 제시한 금액은 5센트에 불과했다. 회사들은 군사정권제안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생산중단시 그 대안공급처를 가지고 있는 스댄다드사를 비롯한 다른 회사들이 계속 방해함으로 리비아는 공급대안 방법이 없는 회사 옥시덴탈에 화살을 돌렸다. 그들은 옥시덴탈이 계란을 한 바구니에 넣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옥시를 택한 것이다. 1970년 늦은 봄 리비아는 옥시회사의 혈액과 같은 석유생산의 감산 조치명령을 내렸고, 옥시는 별수 없이 생산량을 일 8만 배럴에서 5만 배럴까지 감산했다. 옥시가 의도를 잘못 이해할 경우(당초 의도는 가격인상이었음)를 대비해 경찰은 회사 간부를 조사하고, 위협했다. 옥시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에게도 감산명령을 내리고, 같은 방법으로 위협했다.

카다피 정권의 이러한 조치는 아주 적기에 취해졌다. 당시 리비아는 유럽석유수요의 30%를 공급하고 있었다. 수에즈운하가 아직도 폐쇄돼있어 수송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1970년 5월 한 트랙터가 시리아를 통과하는 송유관을 파열시켜 지중해를 통해 유럽에 수송되던 사우디아라비아 원유 일당 50만 배럴의 수송이 중단됐다. 유조선 용선료는 당장 3배로 뛰었다. 석유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수송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지중해 바로 건너편에 있는 리비아의 카다피는 아주 유리한 고지에서 싸움을 하게 됐다. 이러한 이점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리비아의 감산 조치는 시장을 압박하고 긴장을 한층 고조시켰다. 즉 송유관 파괴와 감산으로 인해 일당 130만 배럴이 시장에서 갑자기 사라졌으니 말이다. 더욱이 리비아의 젊은 장교는 석유경제정책과 전략 수립에 있어 암중 모색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압둘라 타리끼(Abdullah Tariki, 반 서방적이며, 급진파 석유민족주의자이며, 8년 전에 그만둔 사우디 석유성 장관)는 트리폴리에 앉아서 현명정부를 위하여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옥시 사장 햄머(Hammer)는 생산 감소의 난국을 벗어나려고 3가지 시도를 해보았으나 모두 실패했다. 첫 번째 시도는 카다피의 사부 격인 낫셀에게 부탁했으나 카다피는 선생의 충고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두 번째는 최대 국제 기업인 엑손에게 비용은 옥시가 부담한다며 증산을 요청했으나 엑손이 들어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당시 존슨대통령에게 이란 원유와 미국산 전투기를 교환하겠다고 요청했으나 이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갖은 위협과 수모를 받으면서 리비아 군사정권과 할 수 없이 힘겨운 협상을 했다. 그 결과 리비아는 로열티와 세금을 20% 인상을 얻어냈다.

그러나 공시 가격의 30% 인상과 리비아 이익이 50%에서 55%로 증가한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리비아의 이러한 계약은 생산국 정부와 석유회사 간의 결정적인 힘의 균형 변화를 가져왔다. 리비아의 성공은 석유 수출국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즉 실질 유가의 하락을 순식간에 역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10년 전에 시작한 OPEC을 통해 시도하던 석유수출국의 자주권과 석유자원을 장악하려던 운동이 재개된 것이다. 석유회사 입장에서 보면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까지 누리던 석유사업의 행태를 소멸시키는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한마디로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 리비아 등 4개국이 국유화의 길로 들어섰다.

결국 리비아의 젊은 장교인 카다피의 전략은 주변 여건과 부합해 유가 상승을 주도하고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자원을 장악하는데 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리비아국민의 원유는 언제 시장에 나오나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리비아 원유는 경질원유로 유황 함량이 적고, 짧은 항해로 지중해를 건너면 프랑스와 이탈리아다. 나토가 빠른 시일 내 반군을 지원하게 된 것도 석유 때문이다. 프랑스는 최초로 전투기를 투입했는데 속심은 질 좋은 리비아 경유를 확보하려는데 있다. 군사적으로나 석유의존도나 비중이 적은 미국은 옆에서 거들다가 마지 못에 참여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리비아 과도 국가위원회와 MOU를 체결하고 유전시설복구를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송유관, 저유탱크 등 판매시설 복구도 지원하기로 했다. 리비아 사태 초기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공습에 나선 프랑스는 발 빠르게 석유이권을 총 생산량의 35%를 차지했다.(프랑스 외무부는 부인)

국민의 석유가 얼마나 걸려서 얼마나 빨리 콸콸 흘러나올지 불확실하다. 그러나 트리폴리의신당국자는 석유생산을 곧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리비아의 전쟁 전 생산량은 160만 배럴이고 이 중 3/4이 수출됐다. 현재 유가로 환산하면 월 40억달러가 넘으니 오랫동안 포화에 시달린 국민을 진정시키는데 쓸 수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그 동안 중단됐던 질 좋은 원유가 공급되니 좋을 것이다. 전란 초기 친 카다피군에 의해 파괴된 싸리(As Sarie)와 미슬라(Messla) 이 두 유전은 수주내 생산 재개되어 일당 25만 배럴의 원유가 송유관을 통해 하리카(Al Hariqa)항에서 선적 수출될 것이라 한다. 그 밖에 해상광구와 남부의 소규모 유전의 생산이 용이하나 원유의 질이 낮으며 그 양 또한 몇만 배럴에 불과하다.

매장량이 풍부한 시르태(Sirte) 분지의 유전은 불확실하다. 이곳의 원유는 라스 라누프(Ras Lanuf)와 브레가(Al Barygah) 항구에서 수출되었는데 파괴규모가 파악되지 않았으며 친 카다피군이 매설한 지뢰가 제거되지 않았다. 만약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가 빠른 시일 내 평정되면 6개월 내 전전 생산량의 65%를 복구 할 수 있다고 한다.



외부에서는 그렇게 쉽지 않다고 본다. 리비아에 제1 투자자인 이탈리아의 Eni사는 65% 회복하려면 아주 빨라야 6개월 그렇지 않으면 18개월까지 걸릴 것이라고 한다. 가스는 몇 주 내에 해저 가스관을 통하여 서부 리비아에서 시실리까지 년간 규모 110억 입방미터 수송 재개될 것이다. 영국의 한 용역회사는 원유 생산이 정상화되려면 3년이 걸릴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부분의 리비아 유전은 리비아 회사가 운영을 직접하고 있으며 주요 유전 생산량을 전란 전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국 기술과 자본을 필요로 한다. 외국 기술자가 들어오려면 안전이 우선이다. 개인경비회사가 멀리 떨어진 유전의 안전에 투입되더라도 만약 친 카다피 반도들이 단지 몇 명의 외국기술자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국제 투자자들은 즉시 철수 기피 할 것이다.

과도 국가위원회에서 제기된 장기간 지속적인 생산량유지 또는 일당 300만 배럴까지 생산증량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떠한 경우라도 석유 메이저를 참여시켜야 한다. 몇몇의 회사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지난 8월 29일 이탈리아 Enisms 과도국가가위원회와 유류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리비아에 석유제품을 무료 공급하고 추후 원유로 상환 받기로 했다. 프랑스도 Total사를 포함한 통상사절단 파견을 준비했다. 영국회사들도 입을 열지 않으나 은밀히 추진하는 것 같다. 결국 외국 석유회사가 개입될 것인즉 국가위원회는 서두르지 말고 국익 차원에서 결정해야 한다.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 자매지인 월간 <CEO ENERGY> 2011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에너지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